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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혁 시인]‘잘남’과 ‘못남’ 사이
2015년 12월 30일(수) 00:00
부유한 사람들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갖는 사회적 지위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난해 한국을 찾은 프랑스 파리경제대학 토마 피케티 교수는 강연을 통해 “지난 90년 동안 이룬 경제적 성장의 75%를 부의 상위 10%가 차지한 데 반해 하위 10%는 단 0.1%만을 가져갔을 뿐”이라며 “이와 같은 불균형 분배는 오늘날의 경제구조로 보아 나아질 수 없음으로 국가가 누진과세 등을 통해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부가 부를 낳는다는 건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떨까?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정치심리학자 딘 키스 사이먼턴 교수가 2006년 ‘역대 미국 대통령의 IQ’가 대학 졸업자 평균을 웃돌았다고 발표한 걸 보면 재능이 나은 사람이 ‘세상 살기’에 훨씬 편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모양이다. 하물며 각종 고시와 의사, 회계사, 변리사, 세무사 등 국가공인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랴.

며칠 전 지인과 차 한 잔을 마시다가 직장 상사에 관한 하소연을 들었다.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으로 화려한 스펙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국가공인자격증까지 보유한 엘리트라는 거였다. 따라서 그 상사는 부하직원들에게 빈틈없는 업무처리를 요구하고, 그로 인해 몹시 힘들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그의 말이 폐부를 찔렀다. 일부겠지만 왜 능력 있는 사람들은 배려를 생각하지 못할까. 어떤 면에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보완해주는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같은 양심적 의무일 수 있다. 생각해보니 나의 직장생활도 흡사했던 것이 떠올랐다. 탁월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 자기 수준을 요구해 그것에 미치지 못했던 나는 그 때문에 고민했었다. 한편으로는 더러 속내를 비출 수 있을 상대를 만났을 때 상위 1%의 배려에 대해 얘기하곤 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세상 살기’ 쉽게 태어난 상위의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머리가 나쁘거나 재능 없이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 일부만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 성장해 사회로 진입한다. 그리고 그 사회 안에서 당연한 듯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리드한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선을 넘어 조직 속에서 자신과 같은 성과물을 내놓지 못한다고 상대를 폄하한다면 참으로 비신사적인 일이다. 공평하지 못하다. 그런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은 단지 행운일 뿐이지 부여받은 권리가 아니다. 모두가 같은 능력을 부여받아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다름이 있기에 각자의 생각대로 세상을 나누어 살 수 있고 그렇기에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안해 하고 겸손해 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나누어 보탬으로써 조직적으로 업무를 완성하게 도와줘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조금 뒤처진 사람들에게 보완과 협조보다는 질책과 짜증으로 박대한다. 옳지 못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공평한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재능 부족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제껏 발견해내지 못했다는 점만이 유의미할 뿐이다. 늦깎이 ‘대기만성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재능은 쉽고 선택은 어렵다.”라고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능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쉬울 것도 없지만 그 재능을 빛의 영역으로 끌어내 보석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선택의 힘이라는 말은 곱씹어 볼 만하다. 특히 소위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내게 그런 능력이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위 동료들과 보람을 나누고 존경받을 수 있다면 진심으로 기쁘지 않겠는가.

세밑이다. 끝을 생각하며 새로움을 맞을 때다. 모든 것은 끝과 시작이 함께한다. 이제부터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 모두 권위를 끝내고 배려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존경받는 이가 우리 안에 넘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