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스포트라이트 - 김향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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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집의 설계도는 의외로 간결하다. 앞을 가리는 것 없이 훤히 트인 남향의 창, 그 하나면 족하다. 창 너머로 넓은 들판이 지평선을 그리고 있거나, 산마루의 능선이 말의 잔등처럼 굽이쳐 흐른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것은 풍경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쏟아지는 빛의 순도를 온전히 지켜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지금 이곳은 전경은 좋으나 햇살은 인색한 편이다. 해는 아침나절 거실 한쪽에 잠깐 머물다 이내 창틀을 넘어 바삐 사라진다. 그 짧은 방문을 놓칠세라 나는 서둘러 소파에 몸을 묻는다. 비스듬히 들이치는 볕이 몸 위에 닿는 순간, 나는 문득 거대한 무대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억겁의 시간을 건너온 빛이 이 순간을 위해 도착한 것처럼, 오직 나만을 비추는 단 하나의 스포트라이트 같다.
그 뜨끈한 감각은 단순한 물리적 열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가 보내는 가장 내밀한 안부이자,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향한 연결의 신호다. 빛이 나를 감싸 안을 때, 나는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낀다. 그 안온함은 기억 저편, 고향집 안방의 아랫목이나 엄마의 자궁 속 같은 원형적 따스함을 닮아있다. 그 품 안에서 나는 조용히 무장을 풀고 존재 자체로 놓인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그늘을 품고 살아간다.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의 사각지대, 오래 닫아둔 방처럼 눅눅해진 내면의 공간 말이다. 햇살은 그런 곳을 가장 먼저 찾아낸다. 볕이 드는 자리에 가만히 몸을 누이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감정들이 서서히 가라앉고, 그 자리에 투명한 평안이 고인다. 빛이 몸을 통과하는 그 짧은 순간은 어지러운 하루 속에서 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가장 고요한 의식이다.
두어 해 전 시골에 정착한 지인의 집을 찾았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그는 영락없는 시골 촌부의 모습이었다. 도시의 세련미는 사라졌지만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삶의 속도를 몸이 먼저 배운 사람처럼 보였다.
작고 소박한 집 마당에는 개 두 마리와 길고양이 열한 마리가 천연스레 어울려 있고, 마당가에는 자잘한 꽃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피어 있었다. 텃밭에서 막 따온 채소들은 그의 부를 증명하는 푸른 화폐 같았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그 집에 머무는 햇살이었다. 낮은 울타리 너머로 툭 터진 들판과 드높은 하늘과 그 사이를 가득 채운 금빛 햇살. 그 집의 햇살은 단순히 ‘드는 것’이 아니라 노상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독 화창한 날이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빛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지만, 빛과 함께 그는 더욱 풍요로워 보였다. 그 풍경 속에서 그는 무대의 주인공처럼, 자신만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갈수록 치솟는 건물들에 창밖의 풍경은 생략되는 게 너무 많다. 햇살은 정해진 시간표처럼 잠깐 들렀다가 사라질 뿐이다. 하여, 언제부턴가 나는 집을 볼 때 가장 먼저 묻게 되었다. 그 집에는 하루에 얼마나 깊은 볕이 머무는가를.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화려한 이력이나 축적된 소유가 아니라 그 빛을 감격으로 받아내는 마음의 여백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주시오.’라고 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투명한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집이란 생명의 요람인 동시에 삶의 ‘품’이다. 나를 받아들이고 품어주는 우주의 작은 성소 같은 공간. 그곳에서 햇살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건네오는 특별한 성찬이 된다. 햇살 가득한 집에는 마음의 그늘이 오래 머물 자리가 없다. 아침나절 잠깐 스치는 햇살에도 이토록 마음이 환해지는데, 하루 대부분을 그 빛 속에 살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더 온화해질까.
언젠가 그런 집에 살게 된다면, 나는 창가에 앉아 구태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빛을 느끼며, 오래된 아랫목의 기억 속에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이미 마음속에 햇살로 지은 집 한 채를 품고 있다. 짧은 아침 볕 앞에 멈춰 서는 순간마다, 나는 우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 빛 아래에서, 가장 조용하고 은혜로운 생의 한 페이지는 이미 쓰이고 있다.
그 뜨끈한 감각은 단순한 물리적 열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가 보내는 가장 내밀한 안부이자,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향한 연결의 신호다. 빛이 나를 감싸 안을 때, 나는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낀다. 그 안온함은 기억 저편, 고향집 안방의 아랫목이나 엄마의 자궁 속 같은 원형적 따스함을 닮아있다. 그 품 안에서 나는 조용히 무장을 풀고 존재 자체로 놓인다.
두어 해 전 시골에 정착한 지인의 집을 찾았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그는 영락없는 시골 촌부의 모습이었다. 도시의 세련미는 사라졌지만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삶의 속도를 몸이 먼저 배운 사람처럼 보였다.
작고 소박한 집 마당에는 개 두 마리와 길고양이 열한 마리가 천연스레 어울려 있고, 마당가에는 자잘한 꽃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피어 있었다. 텃밭에서 막 따온 채소들은 그의 부를 증명하는 푸른 화폐 같았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그 집에 머무는 햇살이었다. 낮은 울타리 너머로 툭 터진 들판과 드높은 하늘과 그 사이를 가득 채운 금빛 햇살. 그 집의 햇살은 단순히 ‘드는 것’이 아니라 노상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독 화창한 날이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빛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지만, 빛과 함께 그는 더욱 풍요로워 보였다. 그 풍경 속에서 그는 무대의 주인공처럼, 자신만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갈수록 치솟는 건물들에 창밖의 풍경은 생략되는 게 너무 많다. 햇살은 정해진 시간표처럼 잠깐 들렀다가 사라질 뿐이다. 하여, 언제부턴가 나는 집을 볼 때 가장 먼저 묻게 되었다. 그 집에는 하루에 얼마나 깊은 볕이 머무는가를.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화려한 이력이나 축적된 소유가 아니라 그 빛을 감격으로 받아내는 마음의 여백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주시오.’라고 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투명한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집이란 생명의 요람인 동시에 삶의 ‘품’이다. 나를 받아들이고 품어주는 우주의 작은 성소 같은 공간. 그곳에서 햇살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건네오는 특별한 성찬이 된다. 햇살 가득한 집에는 마음의 그늘이 오래 머물 자리가 없다. 아침나절 잠깐 스치는 햇살에도 이토록 마음이 환해지는데, 하루 대부분을 그 빛 속에 살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더 온화해질까.
언젠가 그런 집에 살게 된다면, 나는 창가에 앉아 구태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빛을 느끼며, 오래된 아랫목의 기억 속에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이미 마음속에 햇살로 지은 집 한 채를 품고 있다. 짧은 아침 볕 앞에 멈춰 서는 순간마다, 나는 우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 빛 아래에서, 가장 조용하고 은혜로운 생의 한 페이지는 이미 쓰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