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하마터면- 김향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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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하마터면- 김향남 수필가
2025년 12월 01일(월) 00:20
아직 잠이 덜 깬 이른 아침, 바깥의 소란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공포에 질린 개의 비명과 성난 남자의 고함이 뒤엉켜 창밖을 뒤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은 잠이 순식간에 달아나고 아침의 고요도 삽시간에 깨져 버렸다. 안온하던 새벽은 한순간에 불안과 긴장으로 물들었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정말로 ‘개 패듯이’ 개를 때려잡는 소리인지, 아니면 격렬한 부부싸움의 와중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센 감정의 파고만은 분명하게 전해졌다. 개의 비명은 남자의 날 선 목청에 휘말려 더욱 애처롭게 들렸다. 목숨이 위협받는 순간이 아니라면 결코 터져 나올 수 없는 절박한 울음이었다. 남자의 고성 역시 문법도 수사도 없는 날것 그대로의 분노였다.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저 난동을 피우는가. 첫새벽의 평온을 난데없이 흔들어버리는 자는 누구인가. 다급히 창문을 열었다. 바깥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남자도 개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일시적인 소강상태인가? 더 큰 폭풍 전의 고요? 고개를 내밀어 이리저리 살펴봐도 좀 전의 그 긴박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쪽 어디에서 희미하게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성싶었으나 건물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다.

뭐에 홀린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리저리 살피는데 한 남자가 나타났다. 반바지에 민소매 차림의 호리호리 마른 체구였다. 그의 품에는 아기처럼 작은 흰 개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두 팔을 모아 꼭 감싸 안은 모양이었지만 왠지 어울리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형세로 보나 뭐로 보나 문제의 그 인물임은 분명하지 싶었다. 저 마른 몸에서 어떻게 그런 괴성이 쏟아질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는 했지만.

품 안의 개는 잠잠했다. 안정을 찾아가는 중인 듯 아무 소리가 없었다. 남자의 분노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아 보였다. 개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고 있었으나 손끝에는 분노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때마침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대신 물어주는 것 같아 나도 바짝 귀를 기울였다.

“아니, 개를 관리를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관리를!”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고 거칠었다. 왜장질을 치듯이 불퉁한 답변이었으나 소동의 전말은 훤히 꿰어졌다. 그는 사랑하는 반려견과 평소처럼 새벽 산책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걸음은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별안간 목줄이 풀린 개 한 마리가 남자의 개를 덮쳐온 것. 그 순간 숨이 넘어갈 듯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개는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떨었고, 앞뒤 잴 것도 없이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개를 낚아챘다. 쓸 수 있는 무기라고는 오직 목청밖에 없는 듯이.

남자의 말은 묵직한 일갈처럼 들렸다. 개와 더불어 사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 그건 바로 “관리를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관리를!” 맞는 말이었다. 흔히 “우리 개는 안 물어요.” 같은 말은 얼마나 안이한 착각인가. 이 새벽에 벌어진 일이 곧 그 방심의 결과가 아닌가. 구경꾼인 나조차 흠칫 경각심을 갖게 하는 따끔한 훈시였다.

남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개를 추슬렀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위협의 잔상을 떨쳐내려는 듯, 개의 머리를 거듭 쓰다듬었다. 괜찮은지,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깊은 안도와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거의 악다구니에 가까웠던 그 고성과는 확연히 다른, 지극한 부드러움이었다.

한바탕 소동을 치른 후인 듯 나도 소파에 몸을 부렸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저 작은 흰 개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노출되기 쉬우며, 누군가의 보호와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생명체들. 동시에 우리는 모두 그 남자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기꺼이 받아안는 존재들.

삶이란 그런 것일까. ‘하마터면’이라는 순간의 경계에서 서로에게 지닌 무게와 위험, 그리고 책임을 감당하는 일. 예기치 않은 폭발, 다시 찾아온 평온, 그리고 그 모든 걸 끌어안고 살아가는 일.

하마터면 잃을 뻔한 목숨을 안고 조심스레 걸어가던 그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멀리서도 그 표정과 눈빛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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