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화장하는 남자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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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화장하는 남자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5년 12월 08일(월) 00:20
거울 속으로 들어갈 참이다. 무아지경,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바삐 손을 토닥인다. 화장 중이다. 저렇게 공부했다면 올 1등급은 물론 그깟 전국 수석을 못했을까.

우리 마음은 알 수 없나 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힘들어도 신나고, 싫은 일은 아무리 쉬어도 어렵고 괴롭다. 저 마음 붙잡고자 얼마나 애를 썼던가. 하지만 지금은 수학 문제도 영어 단어도 필요 없다. 마음 가는 대로 하는 화장하는 중이다.

수능 끝난 고3 교실. 은행잎 같은 금빛 햇살이 창문에 나풀거린다. 여고 3학년 학생들은 책도 읽고, 십자수도 놓고, 면허시험 공부도 하고, 영화도 본다. 삼삼오오 모여 면접 준비도 한다. 그 간 수능 한길만 보고 달려왔으니 이제 허기진 영혼도 채워야 한다.

어디 세상이 교과서로만 요약되던가. 이제야말로 교과서 행간에 없는 진짜 세상으로 들어가서 생의 파도와 맞서야 한다. 가상공간의 공주가 아닌 현실 세상의 유관순이나 잔 다르크로 살기도 해야 한다. 공부 감옥에서 해방된 주체적 인간으로서 첫발.

그 첫 번째 자유가 화장 아닐까. 그간 짬짬이 화장했다면 이젠 작심하고 한을 분출하듯 얼굴에 톡톡! 톡톡! 찍기 바쁘다. 열아홉 인생, 자아를 뚜렷하게 직시하는 첫 화장인 셈이다.

어디를 봐도 부족한 곳 없이 예쁜데 자꾸 지우고 또 지운다.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려는 의지, 완벽을 향한 저 집념이 어디 숨어있었을까. 녀석 손이 잠시 멈춘다. 눈이다. 얼굴의 가장 작은 면적, 고작 꼬막껍데기 같은 그 주변을 밝게도 했다가 음영을 넣기도 하면서 심혈을 기울인다. 화룡점정은 역시 눈이다.

그렇게 한 번쯤, 자기완성을 향한, 자기애를 향한 나르시시즘 없이 어찌 남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겠는가. 비너스나 아프로디테가 예쁘다지만 어림없는 일, 저 열아홉 청춘이 뿜어내는 향기와 감히 비교할 일인가.

화장하니, 작년 또 다른 화장이 떠올랐다. 지하실 금지구역 문에 들어서자, 염습사는 열심히 숙부를 화장하고 있었다. 지병으로 시난고난했던 숙부의 일그러진 얼굴, 빛바랜 얼굴에 염습사 붓이 오가자, 흑백사진이 컬러사진으로 변하듯 생전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눈, 특히 붓이 숙부 눈두덩이 잔주름을 지우니, 눈을 뜰 것처럼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고인에 대한 예의란다. 세속의 몸을 씻고 삼베옷을 입은 숙부는 자리를 털고 금방 일어날 것 같았다. 마지막 화장은 숙부에 대한 흑백 기억이 총천연색으로 아름답게 기억되었다. 염습사가 말했다. “인사하십시오. 고인과 마지막 작별 순간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화장한 얼굴 위로 명목을 덮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때야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쏟아져 나왔고, 숙부를 더 볼 수 없었다.

숙부는 여태 얼마나 화장하고 살았을까. 생전 화장한 숙부를 본 적이 없다. 가족사진 찍는 날조차 맨얼굴이었다. 당신 얼굴조차 바라볼 겨를 없이 질주한 인생의 관이 덮였다. 화장장 입구에서 첫 화장이었을, 그래서 그 화장은 슬프기보다 더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나도 내 마지막 화장만은 예쁘게 해주길 바란다. 혹여 염습사 붓질이 서툴더라도 입꼬리를 “삐쭉” 위로 올려 각시탈처럼 웃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모두에게 웃는 모습으로 작별하고 싶다. 지지리도 못 산 인생, 염라대왕 앞에서나마 미소로, 예쁘게 다가가고 싶다.

자기 외모를 빛내려는 여고생의 첫 화장이든, 남이 시켜준 숙부의 마지막 화장이든, 혹여 누군가 마음을 유혹하려는 화장일지라도 화장은 아름답다. 우리 인생은 태어나자마자 씻고 입고 꾸미고, 화장으로 시작해서 화장으로 끝나는 거 같다. 소녀 때는 옅은 연분홍 눈화장을 시작으로 아줌마가 되어선 선홍색 짙은 립스틱으로, 화장은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 드러난 가장 진솔한 예술이지 싶다.

이목구비 틈틈이 숨겨진 미를 찾는 과정이자 미를 창조하는 행위가 화장이라는 측면에서 여학생이나 염습사는 물론 우리 모두 훌륭한 예술가나 진배없다. 곱게 살아가려는 마음씨, 예쁘게 만나고 예쁘게 헤어지고 예쁘게 살고 싶다는 선한 마음, 그리고 갈 때조차 싱싱하고 탱탱하게 가려는 욕망, 그게 화장의 포인트 아닐까.

책만 볼 게 아니다. 가끔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 구석구석, 그리고 내면 깊숙이 먼지를 털어내며 화장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 지금도 톡! 톡! 톡! 열심히 화장하는 녀석들, 달뜬 마음으로 진짜 세상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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