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도 사람도 없어요”…미곡창고 골목의 멈춘 시간
산업 중심지이었던 미곡창고 거리…개발과 침체 사이에 선 주민들
송정리역 일대, 도시재생의 명암…남겨진 상인들과 사라진 발길
송정리역 일대, 도시재생의 명암…남겨진 상인들과 사라진 발길
![]() 일제강점기 시대 송정리역의 모습 <광산문화원> |
6·3대선을 앞두고 광주시 광산구에도 기대 섞인 분위기가 감돈다. 대통령이 바뀌면 이 지역도 개발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광산구 송정역 앞에서 ‘사랑식당’을 30년째 운영해 온 김사랑(60) 씨는 “올해는 (개발이) 된대? 아니야, 말만 그렇지”라며 웃었다. 그가 지켜온 골목은 이름과 간판이 바뀌어도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1913년 송정동은 송정리역이 들어서면서 전라남도 장흥·강진·보성 지역의 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해 신작로가 들어섰고 미곡상·정미소·시장이 들어서며 상권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이 몰렸고 인근 농지를 사들였다. 특히 송정리역 앞 ‘매일시장’(현 1913송정시장)은 농축산물의 주요 유통지였다. 1930년대에는 이곳에서 생산된 채소가 서울과 평양까지 공급됐고 목포와 영산포의 미곡과 잡곡· 죽제품·마포·견작물도 이 시장을 통해 오갔다.
현재도 광산구에는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터가 남아 있다. 주민들에게 익숙한 ‘미곡창고’가 대표적이다. 미곡창고 옆 구멍가게가 즐비한 골목에서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상아미용실’을 운영하는 한 어르신은 “미곡창고가 옛날에는 엄청 컸지. 거기서 쌀을 가마니째로 받아왔어”라며 “지금은 1913송정시장이라 부르지만 예전엔 매일시장이라 했거든. 거기 가게들 있잖아? 전부 옛날 정미소였어. 내 눈엔 그 시절 그대로지, 뭐”라고 회상했다.
미곡창고는 현재 주차장으로 변했다. 일제강점 때 미곡창고는 일본군이 쓰던 부식창고였다. 흔히 일본어로 ‘다꽝’이라 불리던 단무지가 창고 한켠에 쌓여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패망한 뒤 이곳은 한국군 보급대 창고가 됐다. 이후 선종국(73)씨의 선친이 이곳을 불하받아 제재소와 정부양곡 도정공장을 운영하며 송정동의 산업 기반을 다졌다.
주민들이 기억하는 미곡창고의 주인 선명수 씨는 구두쇠 그 자체였다. 광산구의 돈을 꽉 쥐고 놔줄 줄 몰랐다. 미곡창고 앞 구멍가게를 간간이 운영하는 노차식(76) 씨는 “그 당시 선명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돈이 정말 많아서 일본군이 떠난 뒤 광산구에 돈 되는 땅은 다 사들였지. 쌀 창고를 세우고 미곡을 찧어대는데, 일하는 인부들이 정말 많았어”라며 “우리는 ‘단꼬바지 단꼬바지’ 그렇게 말하는데 일본 경감이 입던 무거운 바지 같은 걸 입고 다녔어”라고 이야기를 생생히 전했다.
미곡창고는 여러 변천사를 거치며 송정역 일대 산업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처음에는 제재소로 시작해 이후 정부양곡 도정공장으로 운영됐으며 1973년 화재를 겪은 뒤 소촌농공단지로 이전했다. 소촌농공단지는 1987년, 농가 소득 증대를 목적으로 조성된 지역이다. 이처럼 거대한 창고와 산업 기반을 바탕으로 송정역 주변은 점차 발전해왔지만 그 흐름이 송정동 전체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송정동의 발전은 여전히 199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도 있다. 예전 ‘매일시장’이 송정오일장 쪽으로 이전하면서 1913송정시장을 찾는 발길이 자연스레 줄어들었고, 지금은 기존 주민 외에는 거의 찾지 않는다는 것이 지역 상인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손님이 줄면서 장사도 예전 같지 않다. 상인들은 “시장이 살아나려면 대구 서문시장이나 자갈치시장처럼 볼거리·즐길거리·먹을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1913송정시장은 거리의 폭이 좁고 상인들 사이의 협력도 부족해 시장 활성화에 제약이 크다. 이러한 한계 속에 소상공인들은 자리를 떠났고 주민들 사이에서도 개발과 변화에 대한 요구가 점차 커지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이 오래된 시장과 미곡창고 거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지 주목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곳은 여전히 ‘기억의 장소’이자 도시 재생과 개발 사이에 놓인 ‘시간의 경계’로 남아 있다.
/글·사진=정경선 인턴기자 redvelvet2761@naver.com
광산구 송정역 앞에서 ‘사랑식당’을 30년째 운영해 온 김사랑(60) 씨는 “올해는 (개발이) 된대? 아니야, 말만 그렇지”라며 웃었다. 그가 지켜온 골목은 이름과 간판이 바뀌어도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 광산구의 중심산업단지였던 ‘미곡창고’,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모습이다 |
미곡창고는 현재 주차장으로 변했다. 일제강점 때 미곡창고는 일본군이 쓰던 부식창고였다. 흔히 일본어로 ‘다꽝’이라 불리던 단무지가 창고 한켠에 쌓여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패망한 뒤 이곳은 한국군 보급대 창고가 됐다. 이후 선종국(73)씨의 선친이 이곳을 불하받아 제재소와 정부양곡 도정공장을 운영하며 송정동의 산업 기반을 다졌다.
주민들이 기억하는 미곡창고의 주인 선명수 씨는 구두쇠 그 자체였다. 광산구의 돈을 꽉 쥐고 놔줄 줄 몰랐다. 미곡창고 앞 구멍가게를 간간이 운영하는 노차식(76) 씨는 “그 당시 선명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돈이 정말 많아서 일본군이 떠난 뒤 광산구에 돈 되는 땅은 다 사들였지. 쌀 창고를 세우고 미곡을 찧어대는데, 일하는 인부들이 정말 많았어”라며 “우리는 ‘단꼬바지 단꼬바지’ 그렇게 말하는데 일본 경감이 입던 무거운 바지 같은 걸 입고 다녔어”라고 이야기를 생생히 전했다.
미곡창고는 여러 변천사를 거치며 송정역 일대 산업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처음에는 제재소로 시작해 이후 정부양곡 도정공장으로 운영됐으며 1973년 화재를 겪은 뒤 소촌농공단지로 이전했다. 소촌농공단지는 1987년, 농가 소득 증대를 목적으로 조성된 지역이다. 이처럼 거대한 창고와 산업 기반을 바탕으로 송정역 주변은 점차 발전해왔지만 그 흐름이 송정동 전체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 1913송정시장 골목의 한산한 전경 |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1913송정시장은 거리의 폭이 좁고 상인들 사이의 협력도 부족해 시장 활성화에 제약이 크다. 이러한 한계 속에 소상공인들은 자리를 떠났고 주민들 사이에서도 개발과 변화에 대한 요구가 점차 커지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이 오래된 시장과 미곡창고 거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지 주목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곳은 여전히 ‘기억의 장소’이자 도시 재생과 개발 사이에 놓인 ‘시간의 경계’로 남아 있다.
/글·사진=정경선 인턴기자 redvelvet276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