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하면서도 무거운 선물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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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이상하리만큼 당당하고 귀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세상 어떤 불의나 강압에도 머리를 숙이거나 돌리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는 정의롭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내는 이들이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의 삶에서 숭고하고 아름다운 가치관을 발견하게 된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는 철저한 이기심과 절대적 가치로 착각하는 부의 창출이라는 이름으로 탐욕을 부리는 이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내어놓는 이들의 모습이 그들의 시선에는 어리석고 바보 같아 보일 것이다.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영적 보화를 발견하듯, 이들을 통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보고 경험한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의 삶은 쉽지 않은 길이 분명하고 누구도 걸어가기 쉽지 않은 영적인 길이 분명하다. 가톨릭 신앙의 삶은 하느님의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 믿는 이들의 확고한 신념의 삶이다. 자기를 헌신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돌보는 것을 우선하는 이들의 고귀한 신념이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은 길이다.
필자가 매일 보고, 번역하고, 묵상하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는 책이 있는데, 어느 날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신앙은 연약하면서도 무거운 선물이다’라는 문장이다. 왜 신앙이 연약하고 무거운 선물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신앙이 ‘연약한 선물인 이유’는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쉽게 흔들릴 수 있으며,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강요할 수 없는 이유’는 신앙은 지식이나 논리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이나 시련 그리고 세상의 유혹 속에서 신앙이 흔들리거나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이유’는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만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인데 때때로 의심과 갈등을 겪는다.
신앙이 ‘무거운 선물인 이유’는 삶의 방식과 책임을 요구하고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며, 진리에 대한 성실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과 책임을 요구하는 이유’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책임이 따르는데,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 삶과 세상에 도전이기 때문이다.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이유’는 진정한 신앙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삶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성실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와 신앙이 충돌할 때 신앙을 지키는 것은 무거운 십자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무겁지만 참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가치인 ‘영광’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지키고 살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러나 그 무거움을 받아들일 때 신앙은 우리를 더욱 깊은 기쁨과 행복 그리고 평화로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무겁다, 무게가 있다’는 말은 물리적 의미를 넘어 중요성, 가치, 권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무겁다’는 하느님의 영광, 권위, 위엄을 뜻한다. 그래서 신앙이 ‘무거운 선물’이라는 개념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류를 위한 무거운 영광을 짊어지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진정한 영광이란 가벼운 것이 아니라 무게가 있으며 책임과 희생이 따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삶은 선물인가. 그렇다면 어떤 선물인가. 마지못해 살아내야 하는 선물인가. 아니면 너무나 소중해 값지고 귀하게 살아내고 있는 선물인가. 미워하고 싫어하고 질투하면서 이기심으로 가득 차 항상 경쟁의 시선으로 자신을 혹사 시키면서 살아내는,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선물인가. 작고 연약하지만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영광이 깃든 무거운 선물인가. 그런데 이 삶의 선물을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의 삶은 쉽지 않은 길이 분명하고 누구도 걸어가기 쉽지 않은 영적인 길이 분명하다. 가톨릭 신앙의 삶은 하느님의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 믿는 이들의 확고한 신념의 삶이다. 자기를 헌신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돌보는 것을 우선하는 이들의 고귀한 신념이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은 길이다.
신앙이 ‘연약한 선물인 이유’는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쉽게 흔들릴 수 있으며,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강요할 수 없는 이유’는 신앙은 지식이나 논리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이나 시련 그리고 세상의 유혹 속에서 신앙이 흔들리거나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이유’는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만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인데 때때로 의심과 갈등을 겪는다.
신앙이 ‘무거운 선물인 이유’는 삶의 방식과 책임을 요구하고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며, 진리에 대한 성실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과 책임을 요구하는 이유’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책임이 따르는데,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 삶과 세상에 도전이기 때문이다.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이유’는 진정한 신앙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삶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성실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와 신앙이 충돌할 때 신앙을 지키는 것은 무거운 십자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무겁지만 참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가치인 ‘영광’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지키고 살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러나 그 무거움을 받아들일 때 신앙은 우리를 더욱 깊은 기쁨과 행복 그리고 평화로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무겁다, 무게가 있다’는 말은 물리적 의미를 넘어 중요성, 가치, 권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무겁다’는 하느님의 영광, 권위, 위엄을 뜻한다. 그래서 신앙이 ‘무거운 선물’이라는 개념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류를 위한 무거운 영광을 짊어지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진정한 영광이란 가벼운 것이 아니라 무게가 있으며 책임과 희생이 따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삶은 선물인가. 그렇다면 어떤 선물인가. 마지못해 살아내야 하는 선물인가. 아니면 너무나 소중해 값지고 귀하게 살아내고 있는 선물인가. 미워하고 싫어하고 질투하면서 이기심으로 가득 차 항상 경쟁의 시선으로 자신을 혹사 시키면서 살아내는,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선물인가. 작고 연약하지만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영광이 깃든 무거운 선물인가. 그런데 이 삶의 선물을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