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흥학관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지휘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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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흥학관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지휘본부”
첫 맹휴 학부모총회, 성진회 회원 선발 등 광주정신 상징
광주 동구청·시민모임, 학술토론회 기억공간화 모색
2024년 09월 05일(목) 17:00
흥학관기억시민모임과 광주시 동구청은 5일 광주시의회 회의실에서 ‘광주 사적 흥학관 기억공간 조성 토론회’를 개최했다. 시민단체, 지자체, 역사단체 회원 등 참석자들이 흥학관 재조명을 다짐하고 있다. <흥학관기억시민모임>
학생독립운동 95주년을 앞둔 가운데 일제 강점기 광주 청년들의 소양 공간인 ‘흥학관’이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지휘본부이자 전국 확산의 거점이었다는 새로운 주장에 제기됐다.

흥학관은 동학농민군의 집강소, 흥학관,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맥을 계승하는 등 일제 강점기 광주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인 만큼 기억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흥학관기억시민모임과 광주시 동구청은 5일 광주시의회 회의실에서 ‘광주 사적 흥학관 기억공간 조성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는 남도역사연구원이 주관하고, 광주시, 광주시의회가 후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노성태 시민모임 대표는 ‘흥학관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1929년 11월3일 광주고보생과 일본 학생들이 동문다리 등지에서 대치하던 급박한 상황에서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장 장석천과 나승규, 국채진 등이 흥학관에서 긴급회의를 개최, 투쟁 방향의 대전환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노 대표는 이어 “흥학관의 긴급 지침은 독서회 중앙부 책임비서였던 장재성에게 전달됐고, 독서회 회원들을 주축으로 오후부터 거리시위로 전환됐다”며 “오전의 학생들 간 패싸움이 일제를 타깃으로 한 저항의 거리시위로 바뀌면서 거대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흥학관은 또 광주 최초의 동맹휴업투쟁(맹휴)이 벌어졌던 1924년 6월, 이른바 야구 시합으로 발발한 맹휴 때에도 학부모들의 긴급회의와 전남학부형대회가 열렸던 공간이다.

그는 광주지역 최초의 학생 비밀결사조직인 1926년 11월 성진회 결성도 “흥학관 출입 학생 중에서만 회원을 선발하라”는 문건도 있었다”면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분이 흥학관에서 기숙하며 흥학관 안에 설치된 청년학원 고등과 출신인 왕재일이라고 설명했다.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은 ‘흥학관과 1920~30년대 청년운동’ 주제발표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흥학관에 터를 잡은 광주청년동맹이나 광주소년동맹 및 흥학관에서 활동했던 전남청년연맹 소속 간부들의 활동 때문”으로 “흥학관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의 전국 확산 본부였다”고 강조했다.

토론회에서는 흥학관의 기념공간 조성 방안으로 지자체나 민간단체가 직영 또는 위수탁하는 방안과 함께 민간이나 개인이 역사 공간을 무상임대, 무상양여하고, 지자체가 운영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한편, 흥학관은 1921년 광산동 100번지 일대에 광주 유지인 최명구(1860~1924)가 회갑 잔치를 기념하여 만원을 기부, 청년들의 수양 공간으로 건립했다. 현재 광주시 동구 구시청 일대로 해방 이후 광주시청의 부속건물 및 시의회 건물로 활용되다 1960년 후반 시청이 계림동으로 이전되면서, 건물 자체가 헐렸고, 현재는 토지가 분할되어 개인 소유가 된 후 여러 건물들이 서 있다.

/윤영기 기자 penfoot@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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