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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디지털 교과서는 ‘잃어버린 세대’를 낳는다 - 김재인 철학자,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
2024년 05월 28일(화) 00:00
2025년부터 초중고 학생에게 AI 디지털 교과서가 도입된다. 한 세대가 ‘잃어버린 세대’가 될 것 같은 우려가 마음 한 가득이다. 한 마디로 ‘기술’과 ‘교육’의 본질에 무지한 망국적 처사다. 종이책이 그 자체로 완성된 기술임을 모르고, 전자책의 학습 효과에 대한 고려가 없다.

극단으로 완성되어 앞으로 더 발전될 여지가 없는 이미 ‘완성된 기술’이라는 게 있다. 가령 바퀴, 의자, 숟가락, 가위, 잔, 망치 등은 기능과 디자인이 극히 효율적이어서 보태거나 뺄 것이 없다. 그래서 앞으로 더 발전할 여지가 없다. 종이책도 이같은 성격을 지닌 완성된 기술이다.

그러나 완성된 기술을 애매하게 변형하면 더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한다. 비유에 잠시 눈이 멀어 전자책을 ‘종이책 플러스알파’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퇴보의 조력자가 된다.

흔히 전자책은 종이책을 모방한 후 거기에 기능을 덧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고 나면, 종이책보다 전자책이 진보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판단을 하는 데는 외형의 유사성도 큰 몫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껏 전자책을 ‘책’이라고 규정하는 데 익숙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책(종이책)과 전자책(디지털 디스플레이)은 명칭만 유사하지 전혀 다른 유(類, genus)다. ‘책’이라는 명칭 때문에 차이를 인식하기 어려울 뿐이다.

미디어 학자 월터 옹의 분석에 따르면 인간에게 중요한 미디어는 음성, 문자, 활자, 전자 매체의 넷으로 구분된다. 옹은 활자 혹은 인쇄, 즉 종이책의 역할에 주목한다. 인쇄는 지식의 규격화와 체계화를 가능케 했다. 활자체(폰트)는 필서된 글자와 가시성과 가독성 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일정 분량의 종이를 제본해서 만든 책은 파피루스나 두루마리 양피지와 달리 휴대성, 참조성, 전파성이 높았다. 책의 여백, 상단 및 하단의 기호(소제목, 요약, 쪽 등)는 책에 확장성과 참조성을 높였고 목차와 색인은 책을 다각도로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나아가 다수의 책을 한 자리에 늘어놓고 하는 비교는 지식의 밀도를 높였다. 서로 다른 책들을 곁에 늘어놓으면 지식의 비교가 가능해지고 생각을 압축하고 종합하는 훈련이 향상된다.

책은 지식의 유통 미디어였을 뿐만 아니라 생각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장소였다. 종이책은 페이지의 상하좌우와 두께라는 3차원 좌표를 지닌다.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는 ‘장소 세포’가 있어서 일종의 GPS 역할을 한다. 장소 세포는 공간적 위치와 사물의 배치 등을 감지해 안내한다. 이 덕분에 종이책을 읽을 때의 물리적 ‘위치’는 기억, 정보 습득, 회상의 단서가 된다. 게다가 쥐고 메모하는 등 읽기 과정에 손도 관여하며 이는 학습을 더 증진한다.

요컨대 종이책은 전자책에 비해 더 나은 학습 효과를 유발한다. 인지과학 차원에서 해외에는 논문이 다수 나와 있다. 300편 이상의 국내 학위논문과 학술논문이 전자책을 지지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실제로 전자책에서는 ‘그거 어디에서 본 건데!’의 ‘어디’가 약해진다. 전자책은 차원이 없어서다. 일단 두께가 없고, 화면의 상하좌우도 설정에 따라 유동한다. 그래서 종이책에 비해 퇴보한 학습 도구다.

전자책만의 독특한 기능도 있지만 전자책의 ‘장점’이 종이책의 ‘단점’을 보완하기는커녕 오히려 종이책의 ‘장점’은 결코 전자책으로 옮겨갈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종이책의 단점은 그 자체로 장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종이책의 물성(物性)과 불편함은 그 자체가 ‘생각의 훈련’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잃어버린 세대’를 낳을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렇게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에 속도전을 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 책임감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