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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 - 김은영 전남문화재단 대표이사
2024년 02월 22일(목) 21:30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이자 중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의 고향은 산둥성 가오이 둥베이향이다. 작가의 고향은 늘 비가 내렸고 여름이면 큰 물이 범람했다. 키 작은 농작물은 물에 잠기곤 해서 드넓은 땅에 키 큰 수수를 심어야만 했다고 한다.

작가는 수수밭을 무대로 삼아 항일이야기와 사랑이야기로 상상을 펼쳤다. 확실히 좋은 소설은 이미지를 이야기로 만드는 것 같다. 광활한 붉은 수수밭, 타오르는 붉은 태양 등 강렬한 색채 이미지로 기억되는 영화 속 여러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모옌은 에세이집 ‘고향은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에서 작가가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 속 고향이 어떻게 소설이 되었는가를 자세히 들려준다. 탈출하다시피 고향을 떠난 뒤 한동안 고향을 억누르며 살았던 모옌은 훗날 고향이 문학의 밑바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때부터 물고기가 바다에서 헤엄치듯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작가는 아니지만 나 역시 고향인 강진을 다녀오는 날이면 본능적으로 강진에 대하여 쓰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강진 병영마을 한 골목길 돌담은 여느 시골마을 돌담과 다르다. 층마다 엇갈리게 쌓아올린 빗살무늬 형식의 키높은 돌담, 이른바 청어뼈 모양에서 유래한 ‘헤링본 패턴’은 하멜이 가르쳐 준 네덜란드식 담쌓기라 하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상상하게 된다. 강진의 수많은 청자가마터 근처를 걷다가 문득 발견하게 되는 사금파리 한 조각에도 수백 년 전 도공이 품었을 법한 꿈과 열정이 반짝거린다.

12세기 찬란했던 강진의 비색청자는 강진 마량포구에서 500km 뱃길을 달려 개경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도공들에 의해 발전한 일본 도자산업은 마침내 최초의 글로벌 기업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일본 나가사키에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쳐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도달하는 대항해 무역의 길로 이어진다. 이 길이 바로 고대 동서양을 연결했던 교역로 ‘실크로드’에 버금가는 ‘바다의 길-도자기의 길’이었다.

그 길이 만들어진 시기는 하멜이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다가 제주도, 강진 등에서 억류되었던 때와도 겹친다. ‘하멜 표류기’를 보면 조선도 하멜을 통해 네덜란드와 해외무역을 성사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꼬리를 문다.

비단 강진뿐이겠는가. 전남에 고향을 두었다면 누구나 자신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차고 넘치리라. 지역에 숨어있는 수많은 서사가 예향 전남이 문향으로서도 눈부신 성취와 불후의 명작들을 낳은 까닭이기도 하다. 어쩌면 전남의 문화자산은 현재 글로벌 무대에서 각광받고 있는 K-컬처의 정수이자 본령이고 원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남문화재단은 이처럼 풍요로운 문화자산을 2차, 3차 콘텐츠 생산으로 연결하여 세계시장에 내놓을 메가 브랜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적인 수준일 때라야 우리 국민도 감동한다는 대전제로 출발하고 있는 메가 브랜드 사업은 전남의 전통문화예술에 비전을 담아 익숙하지만 한없이 새로운 ‘오래된 미래’를 여는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전남을 통해 세계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새로운 문화로드를 개척하는 일이고, 그 첫걸음은 ‘전남의 예술은 어떻게 브랜드가 되는가’를 실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