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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重慶) 잡감(雜感)- 정근식 서울대 명예교수
2023년 11월 07일(화) 00:00
지난 10월 말에 중국 최대의 내륙도시 충칭을 답사하였다. 이곳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새롭게 복원된 한국 광복군사령부 건물을 돌아보고, 조선의용대의 흔적을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 마침 충칭 가는 길에 들르는 도시가 우한(武漢)이어서 세계적인 코로나 대유행의 진원지를 직접 경험한다는 설레임과 함께, 현재 세계적 화두인 미·중 갈등이 중국의 대도시들에서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물론 주마간산의 짧은 시간은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았지만, 양자강의 생태학적 위용과 연변의 도시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은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출범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상하이 관광객들은 대부분 임시정부가 있던 곳을 방문한다. 이에 비해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의사 거사 후에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나 창사, 광저우 등 일곱 개의 도시를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자리잡았고, 충칭에서도 세 차례나 옮겨 다녔다. 이 도시는 일본군의 폭격에 시달렸지만 끝내 점령당하지는 않았다. 충칭 도심의 연화지에 있는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는 1995년 복원된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널리 알려진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기념사진도 이곳에서 촬영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도착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한국광복군사령부는 1941년 시안에 위치했지만,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943년 충칭으로 돌아왔다. 사령부 건물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한·중 수교 직전인 1991년 광복군 유적조사단이 그 존재를 확인한 후, 여러 차례 중국과의 협의 끝에 2018년 복원이 결정되었다. 전시관은 2019년에 개관하였는데 그동안 코로나로 인하여 방문객이 매우 적었다.

충칭에는 조선의용대의 흔적도 있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발발 후 국공합작기인 1938년 10월 우한에서 조직되었는데, 결성 당시의 사진이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의용대는 3.1운동 직후 결성된 의열단과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했던 김원봉이 장개석의 후원하에 조직한 것으로 1940년 충칭으로 옮긴 후 김원봉과 본대는 그대로 남고, 박효삼과 윤세주가 지휘하던 일부는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이 이별했던 조천문 부둣가는 이제 충칭의 대표적인 고층 건물들이 들어선 번화가가 되었다. 화북지대는 후에 국민당 관할구역을 벗어나 태항산으로 갔고, 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이 되었지만, 충칭의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광복군에 합류하였으며 김원봉이 광복군 1지대장이 되었다. 김구와 김원봉의 오랜 불협화음이 누그러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시관도 그렇지만, 한국광복군사령부 전시관도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오늘날의 중국에서 국민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임시정부나 광복군사령부의 역사와 활동을 그대로 전시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일 뿐 아니라 1943년 미국 OSS의 지원아래 훈련을 받던 광복군들의 사진들을 전시하는 것은 더 미묘한 문제인데, 이들 모두가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광복 후에 이들이 겪었던 씁쓸한 환국 장면은 전시되지 않았다.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료되면서 국민당 정부는 충칭의 중심거리에 ‘항전승리기공비’를 세웠다. 그러나 냉전과 함께 다시 시작된 중국 내전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949년 4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고, 10월에는 신중국이 선포되었다. 11월 말에는 충칭의 운명도 바뀌었다, 함락 또는 해방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장개석은 타이완으로 향했다. 대륙의 주인이 바뀐 후, 충칭의 항전승리기공비는 인민해방기념비가 되었다. 몸체는 그대로 두고 얼굴만 바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충칭의 대표적인 상징 바로 옆에는 미국 애플사의 사과 문양 광고탑이 번듯하게 서 있다. 이처럼 충칭의 풍경들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다. 미중 관계가 경쟁과 갈등으로만 치닫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협력과 상호 의존성이 남아 있다는 대답은 우리를 착잡하게 한다. 맥락없는 이념정치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가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