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배움만으로 즐거울 수 있는가 - 함영대 경상국립대 한문학과 부교수
2023년 10월 31일(화) 00:00
경남 산청에서 연세 지긋하신 분들과 논어를 읽고 있다. 2005년부터 경상대학교 한문학과와 산청군이 제휴를 맺어 남명 조식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 인근에 설립한 남명학연구원에 ‘산청선비대학’을 개설한 이래 18년째 이어오고 있는 고전 강독이다. 산청에서 곶감 농사를 짓거나 공직에서 은퇴하신 30여 명의 어르신들이 근래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3시간의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수업에 참석하고 있다. 참 건실한 공부 모임이라 하겠다. 이런 귀한 분들과 논어를 읽으니 그 즐거움이 배가 된다.

논어를 펴면 첫머리에 “배우고 때로 익힌다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멀리서 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다움이 아니겠는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대개 이 구절은 배움을 통해 삶의 기쁨을 깊이 음미하고 벗들과의 교유를 즐거워하고 남들의 평가에 구애되지 않고 묵묵히 공부하며 스스로 즐거워하는 자세에 대한 권면으로 이해된다. 과연 배움과 동학들과의 교유를 통해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간 백세의 스승, 공자의 참된 가르침을 드러내는 명언이다.

공자는 평생을 명분을 바로잡고 예(禮)가 실현되는 인(仁)의 정치를 고대했다. 심지어 상가집 개 취급을 받는 굴욕을 견디어가며 천하를 주유한 것은 그만큼 자신이 고대하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삶을 돌아본다면 논어의 일면은 공자의 정치사상과 관련한 언명이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정명(正名)이나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아니라 왜 배움과 관련한 구절이 가장 먼저 등장했던 것일까.

이는 논어의 편집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논어에는 ‘유자(有子)’나 ‘증자(曾子)’와 같은 공자의 제자를 스승으로 호칭하는 장면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자와 증자의 제자들, 곧 공자의 재전 제자들이 언행록의 모음집인 논어를 편집할 당시 작업에 참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스승을 통해 들었던 많은 공자의 언행을 최종 편집하면서 무엇을 첫머리에 둘 것인지 고민하고 토론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많은 제자들이 마음으로 감동하여 동의했던 구절이 채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재전 제자들의 사회적 형편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맹자의 관찰에 따르면 천하는 양주가 아니면 묵적에게로 돌아간다고 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건국 초기의 주나라의 건실했던 사회적 기강은 무너지고 저마다의 권위를 내세운 제후왕들이 할거하면서 전국(戰國)시대는 말 그대로 전쟁으로 점철됐다. 백성들은 전쟁에 동원되고 농사를 제때 짓지 못하는 환경이 이어지면서 굶주려 죽은 시체들이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길거리에 버려지는 참상이 이어졌다. 맹자는 그런 전국의 상황을 증언하면서 나 혼자만이라도 잘 살자는 양주와 강렬한 규율을 기반으로 뭉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묵적에게로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인과 예의 정치사상을 계승했을 공자의 재전 제자들이 제대로 사회적 신분을 획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는 68세에 더 이상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했다. 그 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 가운데는 공자에게 스승님처럼 훌륭한 인격과 빼어난 학문을 갖춘 분께서 왜 사회적 발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시는 것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그러한 제자들의 아쉬움과 한탄에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 아닐까. “배우고 그것을 때에 맞게 실현하는 것도 또한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느냐? 벗이 멀리서라도 오면 즐겁지 않겠느냐?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있지만 감내하며 화내지 않는 것이 군자다움이 아니겠는가?” 라며 제자들을 타이르고 권면했던 것이 아닐까.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천하를 주유하는 과정에서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큰 곤경을 겪었다. 제자들은 배고픔과 사회적 멸시를 견디다 못해 자신들이 무슨 풀숲을 떠도는 코뿔소냐고 공자를 원망하며 말한 적이 있다. 이 때 공자는 군자라야 참으로 이러한 곤궁함을 감당하지, 군자가 아니라면 정도를 벗어나고 만다고 달래었다. 논어를 편집하던 당시 공자의 재전 제자들의 사회적 처지는 안정되지 못한 정치 지망생이자 제대로 취직하지 못한 지식인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공자의 격언보다도 공자의 이 말이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해 주었던 것은 아닐까.

국가의 기술개발을 담당하는 총 비용을 크게 줄인다고 한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군자라야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씀에 위로받으며, 가까이에서는 찾기 어려운 먼 곳의 벗을 기다리며,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 공부를 하며 스스로 즐거워하며 군자다움을 잃지 않는 이 땅의 많은 학인들에게 공자의 이 말씀이 오늘에도 위로를 줄 수 있을까. ‘군자고궁(君子固窮)’을 카카오톡의 상태 메시지로 설정한 분의 마음이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