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초대석-단색화 열풍 이끈 한국 현대미술 거장 박서보 화백] “21세기 미술은 ‘치유의 예술’이 돼야 한다”
72년 간 한국 현대미술 한 길…연필·지그재그·색채 등 묘법 독창적 화업 펼쳐
박서보 화백·박승호 기지재단 이사장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 후원 협약
박서보 화백·박승호 기지재단 이사장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 후원 협약
![]() ‘단색화 거장’ 박서보(91) 화백은 ‘연필 묘법’을 시작으로 ‘지그재그 묘법’ ‘색채 묘법’ 등으로 변화하며 자신의 독창적인 화업을 펼쳐왔다. 또한 예술행정가와 미술교육자, 평론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구순의 나이에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작의욕이 여전히 뜨겁다. |
“예술가는 남과 달라야 한다. 선생도, 친구도 닮으면 안 되고 역사에도 빚지면 안 된다.” 박서보(91) 화백이 홍익대 교수 재직 시절에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던 말이다. 그 역시 수행(修行)하듯 자기 세계를 파고들어 새로움을 추구하며 단색화 ‘묘법’(描法·Ecriture) 연작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2010년대 들어 단색화는 ‘한국만의 독창적 미술양식’으로 해외 미술계의 주목을받고 있다.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주택가에 자리한 ‘기지 재단’에서 박 화백을 만나 우직하면서 열정적으로 한길을 걸어온 단색화 거장의 화업(畵業) 72년 예술인생에 대해 들었다.
◇새가 날아와 쪼아 먹은 단풍색 ‘묘법’ 작품=“중동 한 컬렉터가 혹시 손상된 ‘묘법’ 작품을 수리할 수 있겠느냐’고 문의해 왔어요. 이것과 같은 작품입니다. 집 공기를 정화시키느라고 창문을 열어뒀는데 바깥에서 노리고 있던 새가 들어와서 그걸(작품을) 쪼아 먹었다고 합니다. 다른 곳까지 철저하게 손봐서, 아주 깨끗하게 잘 해서 보내줬습니다.”
박서보 화백은 기지재단(GIZI Foundation) 전시실에 걸려 있는 ‘묘법’ 작품 앞에서 흥미로운 일화를 들려줬다. 단풍색을 오롯이 담은 작품이었다. ‘기지재단’은 박 화백의 자택 겸 작업실이다. 수장고와 전시실, 업무공간도 갖췄다. 전시실에는 화백의 ‘묘법’ 작품들을 시기별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박 화백은 “자연을 관찰하면 색깔이 참 풍부하다”면서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절실한 색채와 치유의 예술을 강조했다. 스트레스가 많은 시대에 예술은 스펀지처럼 대중들의 고통과 번뇌를 빨아들여 치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2000년 일본 도쿄 개인전 때 후쿠시마현 반다이산 호수에서 온통 불타는 듯한 단풍 절경을 본 것을 계기로 흑백·무채색 위주이던 ‘묘법’ 작품에 색채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박 화백은 20대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하루 14시간 이상 작업에만 파묻혀 살아왔다. 90을 넘은 현재는 체력의 한계로 작업시간을 대폭 줄였지만 여전히 붓을 놓지 않고 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들어오면서 내가 느낀 것이, 20세기에는 70년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잘 살아왔는데 21세기에는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것을 지키기 위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느냐’하는 생각까지 했다가 ‘아니 끝까지 한번 해보자’ 그러면서 ‘어차피 나를 비우는 일을 해왔으니까 그것에서 하나만 내가 추가하면 될 거다’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연의 색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내 회화 속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 뭇 대중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전부 정신병자가 되니까 온 지구가 병동화 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예술은 폭력아닌 치유여야 합니다. (그림으로) 그들을 전부 치유해야 합니다.”
◇단색화, ‘한국만의 독창적 미술양식’ 주목=박 화백을 비롯한 한국 단색화 작가들이 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때는 2010년대 중반 무렵이다. 2015년 봄 개최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 단색화전은 꼭 봐야할 전시로 손꼽혔다. 그때 박 화백은 기자회견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기자들에게 한국 단색화의 이론적 배경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행위의 무(無)목적성’과 ‘무한 반복성’, ‘행위과정에서 일어난 물성(物性)의 정신화’이다.
또한 같은해 11월 열린 크리스티홍콩 경매에서 박 화백의 1975년 작 ‘연필 묘법’ 작품이 14억 원(수수료 포함)에 낙찰돼 파란을 일으켰다. 그때 그는 “내 뜻이 결국 세계에 통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단색화는 해외 미술계에서 ‘한국만의 독창적인 미술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일찍이 한국 단색화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일본 미술계였다. 1975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이 열렸다. 당시 작품을 출품한 작가는 박서보·권영우·서승원·이동엽·허황이었다. 미술저술가이자 큐레이터인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 아시아’ 대표는 2019년 펴낸 ‘박서보-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마로니에북스)에서 “이 전시는 후일 ‘단색화’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작업경향이 국외 미술계에 소개된 최초의 사례”라고 평가했다.
젊은 시절, 박 화백은 미술계 관행이나 문제점에 대해 ‘반(反)국전 선언’ 등 소신껏 발언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한국 현대미술의 혁명가’ ‘뿔이 난 도깨비’와 같은 별칭이 따라 붙었다. 새로운 추상을 위한 방법론을 모색하다 ‘묘법’으로 귀결되는 박 화백의 인생 여정은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1955년 수덕사 김일엽 스님의 만남과 1967년 어린 차남의 한글 노트 일화, 2000년 일본 단풍계곡 절경은 개별적인 사건이지만 모두 사슬처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20년대 신여성을 대표했던 수덕사 김일엽 스님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내가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우선 수신(修身)을 하면서 당신을 비워내는 일을 자꾸 하라. 당신 이름을 반복해 부르다 보면 부처를 만날 수 있다”고 답했다. 박 화백이 ‘묘법’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둘째 아들이 세 살 때 초등학교 1학년인 형 국어노트에 한글을 쓰려 해요. 네모난 칸 속에 글자를 써야 하는데 잘 안되니까 지우고 쓰기를 몇 번 반복합니다. 화가 나니까 연필로 휘갈겨버려요. 종이가 구겨지고 찢어집니다. 이걸 보고 ‘내가 찾는 게 저거였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체념’과 ‘포기’를 흉내 내 연필로 선을 무한히 그어가며 독창적인 그림세계를 시도했다. 대중들에게 ‘묘법’을 처음으로 선보인 때는 1973년 일본 도쿄 무라마쓰 화랑에서 연 개인전이었다. 박 화백의 ‘묘법’ 시리즈는 연필묘법, 지그재그묘법, 블랙앤 화이트 묘법, 색채 묘법 등으로 변화해 나갔다. 1982년부터 현재까지 한지와 수성물감을 주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두 달간 물에 불린 한지를 캔버스 위에 올리고 연필로 수없이 그어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한지가 밀려 산과 골이 생깁니다. 이 반복적 행위를 통해 나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그걸 이해 못하면 내 그림 이해 못합니다.”
◇지칠 줄 모르는 구순의 현역 화가=박서보 화백과 박승호 기지재단 이사장은 지난 2월, (재)광주 비엔날레를 찾아 ‘광주 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 후원 협약식을 가졌다. 이번 협약에 따라 기지재단은 내년 4월 개최되는 제14회 광주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2042년까지 20년간 매 대회마다 ‘광주 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상금 10만 달러)을 수여할 계획이다. 작가들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쾌척했다. 박 화백은 한국전쟁 직후 캔버스 살 돈이 없어 미군이 버린 레이션 박스를 잘라서 사용하기도 했고, 결혼이후 셋방살이를 하며 12번을 이사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박 화백이 단색화 대가로 우뚝 서기 까지는 63년째 해로하고 있는 아내(윤명숙 작가)의 헌신적인 내조가 뒷받침됐다.
박 화백은 1994년 한국 현대미술의 가치관 정립과 국제화를 기여할 목적으로 ‘서보 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으며, 2019년에는 후진 양성을 위해 재원을 기탁해 기지재단을 설립했다. 연희동에 위치한 기지재단은 젊은 화가들의 작은 전시를 열뿐 아니라 북 토크, 음악공연 등 문화 전반을 다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박 화백은 전쟁과 가난, 독재와 민주화 과정을 두루 거쳤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추상 화가였지만 모함을 받아 이우환 화백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 전시 때는 ‘유전질’ 작품 퇴거를 요청받았다. 또 1974년 ‘앙데팡당’ 전과 1975년 ‘에꼴드 서울’ 전 때는 빨간색이 들어간 작품은 아예 전시를 할 수 없었다.
박 화백은 72년 동안 한국 현대미술의 한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독보적인 ‘단색화’의 세계를 열었다. 80대 중반인 2014년 프랑스 파리 ‘갤러리 페로탱’, 2016년과 2017년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와 같은 유수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을 개최하는 등 여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2021년에는 단색화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미술 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문화계 최고 영예인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요즘 박 화백은 건강유지에 신경을 쓴다. 심근경색(1994년)과 뇌경색(2009년)으로 병원신세를 진적이 있다. 언제나 변화를 추구하며 매너리즘을 경계하기 위해 다짐하곤 했던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해도 추락한다”는 문구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마련해 둔 안식처의 묘지명으로 이미 새겨뒀다. 박서보 화백은 구순을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작업하는 현역 화가다. 지팡이를 짚고 있지만 목소리에는 에너지가 넘친다. 그의 창작활동은 현재진행형이다.
/글=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박 화백은 “자연을 관찰하면 색깔이 참 풍부하다”면서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절실한 색채와 치유의 예술을 강조했다. 스트레스가 많은 시대에 예술은 스펀지처럼 대중들의 고통과 번뇌를 빨아들여 치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2000년 일본 도쿄 개인전 때 후쿠시마현 반다이산 호수에서 온통 불타는 듯한 단풍 절경을 본 것을 계기로 흑백·무채색 위주이던 ‘묘법’ 작품에 색채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박 화백은 20대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하루 14시간 이상 작업에만 파묻혀 살아왔다. 90을 넘은 현재는 체력의 한계로 작업시간을 대폭 줄였지만 여전히 붓을 놓지 않고 있다.
![]() 왼쪽부터 박승호 기지재단 이사장, 박서보 화백,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광주비엔날레 재단 제공> |
◇단색화, ‘한국만의 독창적 미술양식’ 주목=박 화백을 비롯한 한국 단색화 작가들이 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때는 2010년대 중반 무렵이다. 2015년 봄 개최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 단색화전은 꼭 봐야할 전시로 손꼽혔다. 그때 박 화백은 기자회견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기자들에게 한국 단색화의 이론적 배경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행위의 무(無)목적성’과 ‘무한 반복성’, ‘행위과정에서 일어난 물성(物性)의 정신화’이다.
또한 같은해 11월 열린 크리스티홍콩 경매에서 박 화백의 1975년 작 ‘연필 묘법’ 작품이 14억 원(수수료 포함)에 낙찰돼 파란을 일으켰다. 그때 그는 “내 뜻이 결국 세계에 통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단색화는 해외 미술계에서 ‘한국만의 독창적인 미술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일찍이 한국 단색화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일본 미술계였다. 1975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이 열렸다. 당시 작품을 출품한 작가는 박서보·권영우·서승원·이동엽·허황이었다. 미술저술가이자 큐레이터인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 아시아’ 대표는 2019년 펴낸 ‘박서보-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마로니에북스)에서 “이 전시는 후일 ‘단색화’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작업경향이 국외 미술계에 소개된 최초의 사례”라고 평가했다.
젊은 시절, 박 화백은 미술계 관행이나 문제점에 대해 ‘반(反)국전 선언’ 등 소신껏 발언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한국 현대미술의 혁명가’ ‘뿔이 난 도깨비’와 같은 별칭이 따라 붙었다. 새로운 추상을 위한 방법론을 모색하다 ‘묘법’으로 귀결되는 박 화백의 인생 여정은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1955년 수덕사 김일엽 스님의 만남과 1967년 어린 차남의 한글 노트 일화, 2000년 일본 단풍계곡 절경은 개별적인 사건이지만 모두 사슬처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 박서보 화백은 단색화의 특징으로 ‘행위의 무(無)목적성, 행위의 무한 반복성, 행위과정에서 생성된 흔적(물성)을 청산화하는 것’을 꼽는다. 기지재단 1층 전시실에 조화를 이룬 ‘묘법’ 작품과 달항아리, 수양매화. |
“둘째 아들이 세 살 때 초등학교 1학년인 형 국어노트에 한글을 쓰려 해요. 네모난 칸 속에 글자를 써야 하는데 잘 안되니까 지우고 쓰기를 몇 번 반복합니다. 화가 나니까 연필로 휘갈겨버려요. 종이가 구겨지고 찢어집니다. 이걸 보고 ‘내가 찾는 게 저거였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체념’과 ‘포기’를 흉내 내 연필로 선을 무한히 그어가며 독창적인 그림세계를 시도했다. 대중들에게 ‘묘법’을 처음으로 선보인 때는 1973년 일본 도쿄 무라마쓰 화랑에서 연 개인전이었다. 박 화백의 ‘묘법’ 시리즈는 연필묘법, 지그재그묘법, 블랙앤 화이트 묘법, 색채 묘법 등으로 변화해 나갔다. 1982년부터 현재까지 한지와 수성물감을 주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두 달간 물에 불린 한지를 캔버스 위에 올리고 연필로 수없이 그어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한지가 밀려 산과 골이 생깁니다. 이 반복적 행위를 통해 나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그걸 이해 못하면 내 그림 이해 못합니다.”
◇지칠 줄 모르는 구순의 현역 화가=박서보 화백과 박승호 기지재단 이사장은 지난 2월, (재)광주 비엔날레를 찾아 ‘광주 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 후원 협약식을 가졌다. 이번 협약에 따라 기지재단은 내년 4월 개최되는 제14회 광주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2042년까지 20년간 매 대회마다 ‘광주 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상금 10만 달러)을 수여할 계획이다. 작가들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쾌척했다. 박 화백은 한국전쟁 직후 캔버스 살 돈이 없어 미군이 버린 레이션 박스를 잘라서 사용하기도 했고, 결혼이후 셋방살이를 하며 12번을 이사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박 화백이 단색화 대가로 우뚝 서기 까지는 63년째 해로하고 있는 아내(윤명숙 작가)의 헌신적인 내조가 뒷받침됐다.
박 화백은 1994년 한국 현대미술의 가치관 정립과 국제화를 기여할 목적으로 ‘서보 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으며, 2019년에는 후진 양성을 위해 재원을 기탁해 기지재단을 설립했다. 연희동에 위치한 기지재단은 젊은 화가들의 작은 전시를 열뿐 아니라 북 토크, 음악공연 등 문화 전반을 다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박 화백은 전쟁과 가난, 독재와 민주화 과정을 두루 거쳤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추상 화가였지만 모함을 받아 이우환 화백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 전시 때는 ‘유전질’ 작품 퇴거를 요청받았다. 또 1974년 ‘앙데팡당’ 전과 1975년 ‘에꼴드 서울’ 전 때는 빨간색이 들어간 작품은 아예 전시를 할 수 없었다.
박 화백은 72년 동안 한국 현대미술의 한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독보적인 ‘단색화’의 세계를 열었다. 80대 중반인 2014년 프랑스 파리 ‘갤러리 페로탱’, 2016년과 2017년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와 같은 유수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을 개최하는 등 여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2021년에는 단색화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미술 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문화계 최고 영예인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요즘 박 화백은 건강유지에 신경을 쓴다. 심근경색(1994년)과 뇌경색(2009년)으로 병원신세를 진적이 있다. 언제나 변화를 추구하며 매너리즘을 경계하기 위해 다짐하곤 했던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해도 추락한다”는 문구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마련해 둔 안식처의 묘지명으로 이미 새겨뒀다. 박서보 화백은 구순을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작업하는 현역 화가다. 지팡이를 짚고 있지만 목소리에는 에너지가 넘친다. 그의 창작활동은 현재진행형이다.
/글=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