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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치안 살피고 도청 지킨 ‘5·18 기동타격대’ 아시나요
40명 7개조 순찰·전투 임무 수행…항쟁 10일간 범죄 한 건 없어
회사원·전문직·고교생 계층도 다양…5·18 항쟁 주체로 기억해야
2022년 05월 12일(목) 19:55
5·18 42주년 학술대회. <광주시 제공>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광주에서 ‘단 한 건의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전두환 계엄군은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진압했고, 경찰은 군인들의 힘에 눌려 치안유지 등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살인, 상점 약탈 등 눈에 띌만한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전두환에 맞선 시민의 공동체 정신 발휘가 첫손에 꼽히지만, 항쟁 초기에는 ‘기동순찰대’라는 이름으로, 항쟁 막바지에는 ‘5·18 기동타격대’로 불렸던 광주시민들의 역할도 컸다는 전문가 분석이 나왔다.

박해현 초당대 교수는 12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18기념재단, 전남대 5·18연구소 공동 주관으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박 교수는 ‘5·18 시민군 기동타격대 활동 재조명’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지난 2020~2021년 5·18기록관 의뢰로 1980년 당시 기동타격대로 활동했던 대원 36명을 찾아 그 중 30명의 구술을 채록했다고 밝혔다. 기동타격대원들을 대다수 찾아내 편성 과정과 소속, 활동 구역, 전투 과정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항쟁 주체로 인식한 것은 이번 연구가 사실상 최초다.

발표에 따르면 기동타격대는 시민군, 기동순찰대를 거쳐 탄생한 준 군사조직으로, 계엄군이 전남도청으로 재진입하는 1980년 5월 27일 이전까지 도청 사수 및 광주시민 보호를 위해 결성한 결사대다.

기동타격대가 결성되기 전에는 ‘시민군’이 있었다. 5월 21일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행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 것이 시초다.

시민군은 24일 광주시내 질서를 유지하고 계엄군 진입을 감시하기 위해 ‘기동순찰대’로 발전했다. 기동순찰대는 지프, 트럭, 마이크로버스 등 차량 7~8대 가량을 운용하며 광주 곳곳을 순찰했다.

기동순찰대는 공권력이 제 역할을 못하게 된 광주의 치안을 담당하는 ‘자경단’ 역할을 도맡았다. 광주 주요 거점을 밤마다 지킨 것은 물론 술주정이 심한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듣고 출동해 조사실에 인계하기도 했다. 광천동에 출동해 부식을 싣고 가는 계엄군 버스를 추격하기도 하고, 지원동에서는 계엄군과 직접 대치해 총격전도 벌였다.

도청 항쟁 지휘부는 계엄군의 광주 진입 작전이 임박하자 40여명을 모아 전투조직인 ‘기동타격대’를 결성했다. 대장-조장-조원 편제를 갖추고 5~6명씩 7개 조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순찰·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을 만든 것이다.

대원들은 26일 도청 앞마당에서 발대식을 열고 ‘끝까지 도청을 사수할 것’, ‘계엄군보다 먼저 총을 쏘지 않을 것’, ‘싸움, 음주 등 난동자들을 체포해 본부에 이송할 것’ 등 내용을 담은 선서문을 낭독했다.

하지만 기동타격대는 길게 잡아도 15시간만에 ‘해체’됐다. 편성 이튿날 새벽부터 계엄군이 도청 재진입을 위해 진군하면서 대원들이 항전 끝에 전사하거나 체포당한 것이다. 이들은 내란을 일으킨 세력으로 조작돼 지독한 고문을 받고 무기징역 등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박 교수는 “기존에 기동타격대의 64.3%가 하층 노동자였다고 알려진 바와 달리 회사원, 사업가, 전문직, 고교생 등 다양한 계층이 있었다. 단순히 사회 최하층으로서 가난한 삶을 역전하려고 항전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며 “항쟁 초기부터 목숨을 바쳐 싸웠던 기동타격대를 5·18 항쟁의 주체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