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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최진석과 책 읽고 건너가기] 2월의 책 ‘이솝 우화 전집’
“한 마리이긴 하지. 하지만 사자야”
2021년 03월 22일(월) 00:00
정광희 작 ‘Endless story’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건너가려는 자는 멈추지 않고 어디론가 떠난다. 당연히 여행에 인간의 속성이 제일 많이 담겨있다. 여행은 빈틈없이 치밀하고 꽉 찬 자신에게 일부러 빈틈을 만들고, 공간을 허용하고, 정해진 의미들을 털어내고, 시간을 낭비하는 척하면서 스스로 흔들리게 한다. 질문은 여행이고 대답은 멈추기다. 문명의 주도권은 질문하는 자가 쥔다. 대답은 논증과 논변의 주변에 살고, 질문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의 한 형태다.

이야기하는 자가 질문하는 자다. 문명의 주인 자리는 논증하거나 논변하거나 자잘하게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크게 이야기하는 자가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어쩌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면 여행을 떠나라. 자신만의 이야기가 잘 건설되지 않아도 여행을 떠나보라. 끊임없는 건너가기로 자신의 공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완성의 길이라면, 이 여정은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형식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문자를 사용하는 인간 가운데서 논증하거나 논변에 빠진 자는 크기가 작다. 더 커지고 싶은 자는 이야기를 한다. 논증이나 논변에는 여백이 없다. 오죽하면 논문 심사를 방어(defence)라고 할까. 논문은 어쩔 수 없이 공격과 방어의 현장에서 선명하게 존재한다. 빈틈이 있으면 바로 패배하는 것이 논변의 운명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오히려 빈틈을 생명으로 해서 산다.

이야기에서의 빈틈은 소비되거나 낭비되는 공간이 아니라, 더욱 생명력 있는 율동감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공간이 된다. 듣던 자들은 이 여백의 빈틈으로 자신도 몰래 스며들어 이야기에 참여하며 결국에는 이야기의 공동 생산자로 이름을 올린다. 감동의 공유와 폭이 커진다는 말이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사실을 증명한 논문을 수백 편 읽어도 거짓말을 끊기는 어렵다. 차라리 피노키오의 이야기책을 제대로 한 번 읽으면 거짓말을 당장 끊을 수도 있다. 빈틈이 만들어내는 참여의 공간 때문이다. 이 공간에 한 번 들면 감동의 파장을 피하기가 어렵다. 논증이나 논변에서 상대방은 성(城) 밖의 존재가 되지만, 이야기에서는 성(城) 내의 존재다. 같은 성 내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아무래도 성 밖의 사람들보다 더 친하게 지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여 감동은 논문보다는 이야기 안에서 더욱 쉽게 발견된다. 감동을 생산할 수 있다면, 그는 큰 사람이다.

이야기는 아버지보다는 주로 할머니에게서 많이 나왔다. 아버지는 옳거나 쓸모있는 말씀을 주로 대낮에 하셨고, 할머니는 쓸모없이 재밌기만 한 이야기를 주로 밤에 많이 해주셨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조금씩 달랐다.

이야기꾼은 아무리 있는 것을 그대로 되풀이하더라도 생산자의 속성을 아예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듣는 자도 사실은 이야기하는 자가 베풀어놓은 빈틈으로 스며들어 참여자가 되는 관계로 생산자의 역할까지도 공유한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이야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하는 자도 할 때마다 달리하고, 듣는 자도 들을 때마다 달리 듣는 이야기의 변주에는 한계가 없다. 이야기의 변주를 따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많은 모양과 색깔을 갖게 된다.

이솝은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꾼이다.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꾼은 그리 많지 않은데, 이솝은 참 특별하다. 그의 이야기는 가끔 달리 들리기도 한다. 어렸을 때, 나는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를 읽고는 고통 속에서 풍족하게 살기보다는 부족하더라도 마음 편하게 사는 편이 더 나음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번에 읽을 때는 달랐다. 들판에서 겨우 보리와 곡식을 먹을 수 있을 뿐인 시골 쥐를 짠하게 여긴 도시 쥐가 치즈와 꿀과 무화과 등이 풍부하게 있는 도시로 시골 쥐를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 풍성한 먹을거리를 먹으려 할 때마다 사람들이 갑자기 들어와서 놀라는 바람에 편히 먹을 수가 없었다. 시골 쥐는 “자네나 배 터지게 먹으며 큰 즐거움을 누리시게나. 많은 위험과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말일세! 가련한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아무 두려움 없이 보리와 곡식을 갉아먹으며 살아갈 것이네.”라고 말하며 시골로 돌아간다. 가난하더라도 맘 편한 것이 제일이다는 교훈을 얻곤 했는데, 이번에는 풍요를 누리려면 그에 합당한 수고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으로 새롭게 읽혔다. “큰 즐거움”은 “많은 위험과 두려움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어떤 수고도 하지 않으려는 시골 쥐와 큰 즐거움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도시 쥐 사이에서 이동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이쪽과 저쪽 사이를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지금 저쪽으로도 흔들릴 줄 알게 된 것 같다.

논증이나 논변에 빠진 자들은 언제나 이미 있는 것들의 진위나 선악을 다투는 일로 바쁘다. 여기서는 무게중심이 이미 있는 것들로 조금 더 기울어 있다. 이와 달리, 이야기는 빈틈 사이로 열려있어서 이미 있는 것들보다는 앞으로 올 것에 관심을 더 둔다. 여기서는 무게중심이 이미 있는 것들보다는 앞으로 올 것을 초청하는 이야기꾼 자신에게 더 있다. 지식의 영역에도 수입자가 있고 생산자가 있다고 할 때, 생산의 순간은 논증이 아니라 이야기로 일어난다. 모든 생산은 이야기다. 우주선의 생산도 최초에는 이야기로 촉발된다.

논증은 이야기를 수습할 뿐이다. 이야기꾼은 외부의 간섭을 받기보다는 자신을 자신의 호기심에 따라 부리는 자다. 이야기꾼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에 더 가깝다. 질문하는 자가 대답하는 자보다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것과 같은 이치다.

독수리가 날아 내려와서 새끼 양 한 마리를 채가는 것을 보고 갈까마귀가 자기도 한 번 해보려고 “숫양을 내리 덮쳤다. 하지만 숫양의 푹신푹신한 털에 발톱이 박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발톱을 빼내 도망칠 수가 없었다.” 목자가 그대로 잡아서 집으로 가져갔다. “아이들이 이 새가 무슨 새냐고 묻자” 목자가 말했다. “이 새는 갈까마귀가 분명한데 독수리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누구나 자기가 되려 하지 않으면 삶은 늪에 빠진다. 그래서 자신을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향해 걷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지만, “그에 합당한 수고와 위험을 감수”하기만 하면 거기서 오는 큰 성취와 즐거움 또한 가장 크다.

자신을 향해 걷지 않았던 갈까마귀는 결국 죽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해 걷지 않고, 타인을 향해 걸었던 여우는 갈까마귀가 당했던 만큼의 험한 최후를 맞는다. 여우는 자기보다도 훨씬 더 긴 “뱀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 긴 모습이” 부러운 나머지 “뱀과 똑같이 되고 싶어서 옆에 누워 자신의 몸을 길게 늘이려고 시도”하다가 “몸이 찢어져 버리고 말았다.” 자기를 향해 걷지 않은 자는 누가 되었든 그 정도에 따라 해를 입는다. 심하면, 몸이 찢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먹을거리가 되기도 한다.

자신을 향해 걷는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으면, 죽임을 당하는 정도의 해를 입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얼마든지 망신을 당한다. 사자의 모습을 부러워하던 당나귀가 “사자 가죽을 둘러쓰고서 사자 행세를” 하다가 “바람이 불어와 사자 가죽이 벗겨져 날아가 버리자 당나귀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러자 모두가 달려들어 막대기와 몽둥이로 당나귀를 때렸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지만 않았으면, 당나귀는 망신을 당할 일이 없다. 사자를 부러워하는 당나귀의 내면은 참 초라하다. 자신을 향해 걷지 않은 내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자는 크다. 이야기꾼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 아니겠는가.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듣는 일을 자주 하면, 사람은 커진다. 자신을 향해 걷는 자가 큰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자, 질문하는 자, 생산하는 자, 지배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를 향해 걷는다. 사람은 일단 크고 굵어야 한다.

“새끼를 고작 한 마리밖에 못 낳는다며” 여우가 “면박을 주자” 암사자가 조용히 한마디 한다. “한 마리이긴 하지. 하지만 사자야.”

※철학자 최진석 교수와 함께 읽는 3월의 책은 루쉰의 ‘아Q정전’입니다. <광주일보 3월 2일자 16면 참조> www.kwangju.co.kr/article.php?aid=1614607200715566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