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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최진석과 책 읽고 건너가기] ‘아Q정전’ …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아Q는 과거에 산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할 때 이런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도 옛날에는…네 놈보다 훨씬 잘 살았어!”
아Q는 과거를 파먹어야 배가 불렀다.
2021년 04월 28일(수) 00:00
박종석 작 ‘통찰의 눈’
이것저것 다 차치하고, ‘아Q’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우선 “그의 성씨를 거론하는 사람이 더는 없어서 아Q의 성씨가 무엇인지 결국 알 길이 없었다.” “대관절 아Quei는 ‘계수나무 계(桂)’ 자를 쓴 아구이(阿桂)일까, ‘귀할 귀(貴)’ 자를 쓴 아구이(阿貴)일까?”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본적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성씨도 알려지지 않고 이름도 알 길이 없고 본적도 알려진 바가 없는 그의 존재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 이는 아Q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까지 싸잡아 폭로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주체, 바로 아Q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물론 자신을 아는 것이 존재적 차원의 일이라 어떤 면에서는 또 가장 어렵기도 하다. 가장 치명적이면서 가장 어려운 이 과업을 수행하느라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리곤 한다. 하지만, 분명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의 길은 곧게 높이 오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의 길은 평탄하지 않은 내리막길이기 쉽다. 인생에서 누구나 탄탄대로를 달리고 싶지만, 그 행운이 누구에게는 허용되지는 않는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야 그 행운을 잡을 수 있다. 그것을 모르면 인생은 쉽게 엉망진창이 된다. 역사도 그러하고 나라도 그러하다. 자신을 향해서 걷는 일을 할 때의 의식 활동이 바로 생각이거나 사유이다. 자신을 모르는 자는 생각이 없거나 생각을 할 줄 모른다.

“아Q는 집이 없어서, 웨이장 마을에 있는 토지신과 곡신신을 모시는 사당에 살았다.” 시간은 공간에 담긴다.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사당”은 과거의 시간을 담는 공간이다. 아Q는 과거에 산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할 때 이런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도 옛날에는.... 네 놈보다 훨씬 잘 살았어!” 아Q는 과거를 파먹어야 배가 불렀다. 일본에 다녀오고 서양 학당을 다니던 첸 대감댁 큰아들에게서 언제부터 변발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부인은 세 번이나 우물에 뛰어들었다.” 아Q가 보기에 “변발이 가짜인 이상 사람 노릇을 할 자격을 진즉에 잃은 것이고, 그의 마누라가 우물에 세 번만 뛰어들고 네 번은 뛰어들지 않았으니 그녀 역시 훌륭한 여인이 못 되었다.”고 보았다. 과거를 지키지 않은 것을 아Q는 참아내지 못했다. 생각은 자기를 벗어나려는 충동인 호기심이 동작하는 한 형태이므로 반드시 앞을 향한다. 생각이 없으면, 지난 일을 파먹는 데 골몰한다. 생각이 없으면, 대답에 빠지고, 생각을 하면 질문을 시작하는 것이 이런 이치다. 아Q는 애석하게도 사당에 살 수밖에 없는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생각이 멈춘 자, 그래서 과거를 사는 자, 아Q.

생각이 멈추면, 확증편향이나 자기 확신에 빠진다. 생각은 속성상 호기심으로 격발되므로 개방적이다. 생각이 멈추면 개방성이 사라져 자기 확신의 성벽에 스스로 갇힌다. 자기 확신이 무너지면, 자신의 존재성이 희미해지므로 억지로 자존심을 내세우게 된다. “아Q는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웨이좡 사람들은 물론이고 생원 시험 준비를 하는 동네 두 글방의 도령들조차 안중에 없었다.” “심지어는 ‘내 아들놈이 그보다 훨씬 더 나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훨씬 더 압도적인 서양 문물을 눈으로 보고도 정신적으로는 동양이 더 강하다고 하거나 조선이 더 강하다고 하면서 사양을 배우려는 태도는 갖지 않은 채,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며 위정척사에만 빠졌던 사람들은 대개 다 생각이 멈춘 자들이었다. 눈앞에 구체적으로 자신보다 더 강한 자가 서 있어도, 애써 외면하며 사실은 자신이 더 강하다고 심리적으로 위로해버렸다.

이런 연유로 아Q도 위정척사의 전사가 되었다. 첸 대감네 큰 아들은 서양이라는 적대적 타자를 수용하는 시도를 꾸준히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아Q는 “그를 보기만 하면 몰래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는 성안에 사는 사람들도 완전히 무시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석 자 길이에 세 치 너비로 만든 나무 의자를 아Q가 사는 웨이좡에서는 ‘긴 의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성안 사람들은 ‘가는 의자’로 부른다는 거였다. 그는 이건 말도 안 되고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확신에 빠지면, 자기 진리에 도취 되어 자기와 다른 것은 적대시하는 것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니 무엇인가를 받아들여 더 풍부해질 일이 없다. 당연히 성장도 멈춘다. 뭘 모르고 위정척사에 빠진 사람들은, 아Q처럼 “영원히 우쭐거렸다.”

이런 태도는 ‘정신승리’라는 몽환적 심리를 낳는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생각이 끊기고 정신승리의 심리적 몽환 상태에 빠진다.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혼동하는 것이다. 동네 건달들은 “아Q를 놀리다가 결국 때리기까지 했다. 아Q는 형식적으로는 졌다.” 객관적으로는 패배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Q는 심리적 기대에 빠져 이것을 몽환적으로 해결해버린다. “아Q는 잠시 서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들놈에게 맞은 셈 치지.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라니까...’ 그리고 나서 그도 아주 만족스럽게 승리한 기분이 되어 돌아갔다.” 패배를 승리로 바꿔버리는 심리적 자아도취이다. 생각이 끊기면 이 지경에 이르는 것이 어렵지 않다. 객관적 패배를 심리적 승리로 바꿔버리는 정신승리에 빠지는 한, 객관적으로 패배하는 정도는 점점 더 심해지지 않을 수 없다. 건달들은 오히려 더 심하게 아Q를 굴욕적인 상태로 내 몬다. “아Q, 이건 자식이 아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야.” 정신승리법에 빠진 아Q는 이제 ‘짐승’으로 공인된다. 정신승리법이라는 무기(?)를 가진 아Q는 스스로 더 깊이 무릎을 꿇는다. 이제 자신이 알아서 자신을 버러지로까지 격하시켜간다. “난 버러지야!”

버러지를 대접해 줄 사람은 드물거나 거의 없다. “자오 나리 댁이 털린 뒤 웨이좡 사람들은 다들 고소하면서도 두려웠다. 아Q도 마찬가지였다.” 아Q는 도둑으로 몰려 관청으로 끌려갔다. 끌려온 이유를 묻자 아Q는 대답한다. “내가 반란을 하려고 했거든.” 심리적 몽환사태에 빠지면, 객관적 사실에 자신을 맞추지 못하고 분열된다. 도둑으로 몰려서 붙들려 왔다는 사실이 자신의 분열된 심리 안에서 반란을 도모하다 끌려 온 것으로 부풀려졌다. 생각은 분열된 의식을 통합시키지만, 생각이 끊기면 통합된 의식도 바로 분열된다.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생은 의식의 분열 속에서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다. 아Q가 결국 사형을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도 모두 자기가 자기에게 분명하지 않아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진 결과이다. 이런 사람은 사는 일이 무엇이고, 죽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죽어가는 마당에도 큰일과 작은 일을 분별하지 못한다. 아Q에게는 자신의 사형을 결정짓는 문서에 서명을 할 때, 글을 몰라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동그라미를 동그랗게 그리지 못한 것”이 더 신경쓰였다. 그는 “그의 ‘이력’에 오점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유가 아니라, 자신을 잃은 자의 자기 분열이다. 정신승리와 정신분열은 매우 가깝게 있다. 죽으러 가는 길에 자신을 구경하러 나온 군중들을 보면서, 아Q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것은 내 목을 날리러 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다급해져서 눈앞이 깜깜해지고 귀에 천둥이 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아Q는 찰나적인 정신승리나마 포기하지 못한다. 끝가지 정신승리다.

그는 “살다보면 원래 목이 날아갈 때도 있게 된다는” 생각을 해서, “다시 태연해지곤 했다.” 그러나 사실의 전개는 심리적 위안으로 변경되지 않는다. 역사가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바람이나 기도로 좌우되지 않는 것과 같다. 아Q는 어쩔 수 없이 종내에는 “두 눈이 캄캄해지고 귀가 윙윙거리고 온몸이 산산이 흩어지는” 지경을 피하지 못한다. 나라가 망하는 모습도 이러하다.

아Q가 총살을 당한 후, 주위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볼거리가 될 정도로 극적이지 않은 것에만 서운해 하였다. “총살은 목을 치는 것보다 볼거리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볼거리도 안 되는 사형 집행 현장을 “괜히 따라다니느라 헛고생” 한 것이 불만일 뿐이었다. 나라가 망해도 주변 나라들은 이럴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인생은 엉망진창이 된다.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도 엉망진창이 된다. 바라는 것이 없으니 생각도 없다. 아Q는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는가? 중국은 최소한 자신을 아Q라고 볼 줄은 알았다. 우리는 아Q가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는 아Q가 아닌가?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우리는 알까? 무엇인가를 바라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만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안다. 자신을 향해 걸을 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물을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아Q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철학자 최진석 교수와 함께 읽는 4월의 책은 류성룡의 ‘징비록’입니다. <광주일보 4월 2일자 16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