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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들녘에서
2020년 12월 23일(수) 06:00
강대석 시인·행정학 박사
바람결은 조금 차지만 봄볕처럼 포근한 햇살에 끌려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시골 텃밭으로 향했다. 텃밭에는 마늘, 양파 등 채소가 조금 심어져 있는데 코로나19 예방을 핑계 삼아 시골에서 며칠 지내기 위해서다.

밭에 들어서자 초가을에 심은 양파와 마늘이 제법 빈 이랑을 채우고 바람에 일렁인다. 농사일이 서툰 주인의 손길에도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대견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무심코 양파 고랑에 쭈그리고 앉아 그들의 세상을 내려다본다. 멀칭 비닐 구멍마다 잡초가 파랗게 돋았다. 그 틈에 끼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양파가 머리카락처럼 가는 팔을 늘어뜨리고 바람에 떨고 있다. 멀리서 볼 땐 제법 푸른 밭으로 보였는데 가까이 보니 풀들의 세상이다.

습관처럼 풀을 뽑는다. 가을 가뭄 탓인지 잘 뽑히지 않는다. 손으로 당기자 이파리만 뜯기고 만다. 할 수 없이 호미로 긁으니 그제야 몸통이 딸려 나온다. 온몸이 뜯겨도 뿌리만은 지키겠다는 그들의 저항이 대단하다. 하긴 원래는 그들이 이 땅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먹고살기 위해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생육에 방해가 된다고 뽑아내니 저항이 클 건 당연하다. 한참의 작업 끝에 풀밭이 양파밭으로 변했다. 뭐든 바꾼다는 것은 힘들다. 하물며 제도의 틀을 바꾸는 개혁은 얼마나 저항이 크겠는가?

배추 고랑으로 걸음을 옮긴다. 김장할 때 남겨놓은 처진 배추 몇 포기가 추위에 움츠리고 있다. 누렇게 시든 이파리가 가랑잎처럼 떠서 팔랑인다. 집 없는 달팽이 한 마리가 붙어 있다. 지난가을 눈을 속이며 이파리를 갉아 먹던 그놈일 것이다. 서리가 몇 번 내렸는데도 배춧잎에 숨어 용케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집 없는 달팽이라는 이름부터가 측은하다. 삼라만상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기에 제집이 없어 돌아가지 못하는 집 없는 설움이 어찌 저 미물에게만 있을까? 인간 세상은 더 끔찍한데!

올해 가장 큰 이슈는 집값이었다. 정부의 수많은 대책에도 아파트값은 정책을 비웃듯이 집 없는 서민들을 울렸다. 우리나라의 무주택 가구는 전국적으로 874만 가구이다.(통계청) 더구나 비혼·이혼·졸혼 등 1인 가구의 증가로 주택 수요는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니 아파트의 공급 부족과 전세대란에 대해서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어 내겠다”고 말한 국토부 장관의 심경이 이해가 간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속내를 보였을까 싶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광주 지역에도 서울 대구 등 다른 지역의 투기 세력이 몰려와 일부 지역의 주택시장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한다. 아파트 투기는 무주택 서민들의 꿈을 빼앗는 무자비한 행위로 빈부 양극화를 초래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문득 어느 신문에서 본 칼럼의 내용이 생각난다. 세계 경제학자들이 만든 세계 각국의 불평등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한국 사회는 상위 10%가 전체 부의 43.3%를 차지하고, 하위 50%가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1.8%에 불과하다고 한다. 마치 100칸이 있는 설국열차에 상위 10%가 앞에서부터 43칸을 차지하고, 하위 50%는 달랑 꼬리 2칸에 몰려 있는 형세이니 우리 사회의 빈부 불균형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려 있다. 밭 언덕의 억새가 바람에 솜털이 거의 날린 채 가는 허리를 비비며 서걱댄다. 미루나무 빈 가지 끝에서 밭 주인을 지켜보던 까치들이 울음소리를 지우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겨울 들녘이 한 장의 수묵화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핸드폰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인근 식당에서 발생했다는 문자가 떴다. 매일매일의 안전 안내 문자가 공포 그 자체다. 이럴 때는 활동 반경을 줄이고 가급적 집안에만 있는 것이 최고의 백신일 것이다. 사상 최악의 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새해에는 제발 일상을 되찾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