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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유하는 ‘종이약국’
2020년 12월 09일(수) 23:10
오랜만에 둘러본 ‘워드 온 더 워터’(Word on the water)의 페이스북에는 슬픈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책방지기인 존 프리벳(Jon Privett·55)이 모친의 부고를 한장의 꽃 사진과 함께 전한 것이다. 그의 짧은 글 아래에는 한때 ‘그 곳’을 다녀간 이들이 건넨 위로의 메시지가 가득했다. 2년 전 가을, 밀려드는 고객들로 바쁜 와중에도 취재차 방문한 나에게 친절하게 대했던 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어떤 책을 읽으며 달래고 있을까?”

그도 그럴것이 ‘워드 온 더 워터’는 지난 2011년 런던 리젠트 운하에 깜짝 등장한 물위의 서점이다. 영국 옥스포드대 출신의 독서광인 패디 스크리치와 프리벳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독서를 업으로 삼기 위해 바지선(Barge)에 책방을 꾸렸다. 젊은 시절,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낀 프리벳은 몸이 편찮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회사를 그만 둔 후 사회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을 보살피는 일을 해왔다. 마침 프리벳의 프랑스 친구 스테판 샤또가 자신의 낡은 바지선을 좋은 일에 쓰라며 선물한 게 계기가 돼 영국 최초의 수상서점을 열게 됐다.

2011년 5월, 역사적인 ‘출항’에 나선 ‘워드 온 더 워터’는 ‘세상에 하나뿐인’ 독특한 콘셉트로 지역사회의 이슈가 됐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책을 가까이 하면서 쌓아온 ‘북 큐레이션’은 런더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연으로 힘들어 하는 청춘, 하루아침에 실직한 중년, 자녀와 갈등을 겪고 있는 부모들…. 프리벳과 스크리치는 다양한 고민에 빠진 고객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삶의 지혜가 담긴 책을 처방하는 독서 치료사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랑스에도 두 사람과 비슷한 책방지기가 있다. 2015년 독일 여성작가 니나 게으르게 쓴 소설 ‘종이약국’에 등장하는 주인공 페르뒤다. 21년 전 말없이 자신을 떠난 연인을 평생 원망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그는 어느날 그녀가 보낸 편지를 뒤늦게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녀에겐 자신을 떠나야만 했던 사정이 있었는데 오해를 하는 바람에 20여 년의 시간을 세상과 담을 쌓으며 지낸 것이다. 이후 그는 상처를 치유하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다른 이들의 고민에 귀를 기울였고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는 약 대신 책을 조제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

최근 국내에서도 ‘종이약국’이 문을 열었다. 전국 40여 개 중형서점 연합인 한국서점인협의회가 출간한 ‘종이약국: 마음이 아픈 당신을 위한 한 권의 처방전’이다. 각 서점마다 우체통을 설치하고 고민이 담긴 엽서를 모아,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인생의 고민 20가지를 추려서 묶어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요?”, “이별이 너무 아파요”,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어요”…. 이 책에 담긴 20가지의 고민과 다독가들의 처방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나의 고민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로나19로 상심이 큰 계절이다. 그렇다고 여행이나 문화 나들이도 여의치 않다. 이럴 땐 책을 읽으며 ‘집콕’생활의 우울함을 달래는 것도 좋은 처방일 듯 싶다.

<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