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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
철학자 최진석과 책 읽고 건너가기 10월의 책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2020년 11월 16일(월) 00:00
조근호 작 ‘알에서 나온 고독한 새’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이보다 더 빛나는 한 줄이 또 있을까? 구도자들은 신을 향해 걷는 방식으로 포장해서 사실은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들이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 고독한 구도자를 닮는다. 구도자들이 보통의 삶을 끊은 채, 자신이 걸어야 할 궤도를 스스로 짠 후, 일부러 거기에만 맞춰 돌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마저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고백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멀어진다는 건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하기 싫다는 이유로 대부분은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의 문을 열지도 않는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에는 쉽고도 강하게 빠지면서,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따르는 일은 왜 그리 어려워하는가. 여기서 쉽고 어려움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밖에서 오는 ‘바람직함’은 쉽게 알 뿐만 아니라 확신의 힘으로 날렵하게 따르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에서 오는 ‘바라는 것’은 알기도 어렵거니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따르기는 너무 두렵다. ‘바람직함’은 밖에 이미 정해져 있어서 가정이나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것이지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다.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대등한 문법까지도 이미 펼쳐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만 하면 된다.

반면에, 자신은 심지어 자신에게마저도 비밀스럽다. 자신을 알려면 사유하고 숙고하는 수고를 심하게 들여야 한다. 힘든 일은 피하고 힘들지 않은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가진 인간이라는 이 게으른 존재들은 힘들여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고, 정해진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려고만 한다.

데미안의 말은 분명하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복종해버린다.” 밖에서 주어진 것을 살기는 쉽고,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살기는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와 도덕과 종교에서 제공하는 믿음의 집단 최면에 빠져 “그냥 복종해버리면서” 자신을 스스로 내팽개치곤 한다.

내팽겨진 자신을 되찾아야 정치와 종교와 도덕이 제 자리를 잡는다. 정치와 도덕과 종교는 닫혀 있고, 자신은 호기심으로 열려 있다. 호기심으로 열린 그 틈새를 비집는 일을 우리는 생각이라고도 하고 사유라고도 한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사유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며 정해진 것에 틈을 내어 자신을 그 틈새에 끼워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 익숙함과 믿음에 균열이 가면서 자신이 열려가는 과정을 “데미안에 의해 눈뜨게 된 사유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어렵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쉽다.

진짜 인간은 세계를 지니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유하여 알려고 한다. “내면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는 것과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반대로 나무나 돌, 기껏해야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인식의 희미한 불꽃이 최초로 번쩍 빛나는 순간, 그는 바로 인간이 된다.”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다. 알려고 하는 인식의 희미한 불꽃이 시작될 때 당사자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던 편안하고 안락한 것들에 심한 균열이 가는 것을 경험한다.

싱클레어의 균열은 거짓말로 시작된다. 거짓말은 가끔 금지된 것 너머를 엿보려는 태도인데, 금지된 것 너머를 엿보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싱클레어는 우선 익숙한 자신을 넘어서고 싶어 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자기 자신 이상’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자는 멈춰 있는 정해진 자신을 우선 거짓된 존재로 조작해서 거기에 금을 내고 쪼갤 준비를 해야 한다.

‘거짓말’도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 이상으로 넘어가는 도전의 한 형태일 수 있다.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싱클레어는 밝고 환하며 기품 있던 세상에서 자신과 전혀 상관없던 어둡고 칙칙한 세상과 인연을 맺는다.

모든 새로운 것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두려움 속에서 싱클레어는 어둠을 이미 새로운 세계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가족들은 여전히” 밝고 환한 곳에서 멈춰선 채 싱클레어를 “애 취급하고 있었다.” 여기서 밝고 환한 세상의 중심 기둥이었던 “아버지의 권위가 최초로 찢긴 자국”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이 되려면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하는 기둥들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었다.

거짓말을 매개로 “다른 세계”로 추락한 싱클레어는 마침내 “죄를 짓고 불행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라면 영원히 품을 수 없는 세계를 싱클레어는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탈하여 이제 싱클레어는 그런 사람들과 투쟁하는 방황을 시작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한 세계를 깨뜨리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태어나기 위해서 한 세계를 깨뜨린 자는 양쪽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깨뜨린 세계에서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고, 태어난 세계로는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 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 뿌리를 내려가는 싱클레어가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은 자기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갑자기 생경해 보이는 풍경이다. 어두운 “다른 세계”와 밝고 익숙한 세계 사이에 끼면 이 생경함의 엄습을 피할 수 없지만, 생경함은 어떤 방도로도 해석할 수 없어 신비의 꿈결 같기도 하다.

방황은 종종 방탕을 낳기도 하니, “방탕한 생활은 신비주의자가 살기 위한 최상의 준비 활동”이라는 데미안의 말은 그냥 방탕에 빠진 싱클레어를 가볍게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싱클레어의 방황에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양쪽 세계에 낀 자의 사명은 방황과 방탕 속에서도 양쪽 세계를 품어야 하는 운명으로 진화하는 일이다.

이 진화를 먼저 해낸 데미안의 모습을 보라. 데미안은 “자신만의 법칙대로 사는 듯 진귀하고 고독하고 조용하게 걷고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을 걷는 자는 사이에 낀 채 혹은 양쪽을 품은 채 고독하다.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 고독한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신적 존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유’(有)의 세계와 ‘무’(無)의 세계를 동시적으로 품어야 ‘도’(道)라고 말하는 노자는 아브락사스의 중국판이다. ‘유’와 ‘무’를 동시에 품은 노자도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의 세계”만을 가진 자들과 달리 “홀로” 고독했다. 양쪽을 품은 신비적 존재는 고독하다. 고독한 자는 개방적이고, “인위적 절반의 세계”에서 편안한 자는 폐쇄적이다.

인위적 절반에 갇혀 폐쇄적인 자는 사랑을 학습하거나 거래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존재와 일치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일이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고 싱클레어가 “이제 홀로 있을 수 있고 독서와 산책을 즐길 수 있다.”고 말 한 것은 자신을 향해 걸었던 길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여 문득문득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는 뜻이겠다. 사랑은 고독의 경지에 이르러 자신이 자신으로 돌아간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왕국인 것이다. 사랑은 도덕과 무관하다. 도덕은 한 쪽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칼끝이 조금이라도 향한다면, 그것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은 음악을 닮았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도달하여 “천국과 지옥을 잡아 흔든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음악”을 닮았다.

신은 고독의 정상에 있다. 정상에 있어야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허용된 양쪽을 다 자신의 세계로 일치시킬 수 있다. 자신에게 도달하면 신처럼 정상에 선다. 당연하게도 “각자를 위한 당연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아브락사스를 추종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브락사스가 되는 일인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자신에게 도달한 개방적 존재다. 고독과 개방이 일치하다니.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인 천직을 성실히 수행하면, 신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눈을 감고, 신의 입맞춤을 받아들이게 된다. 입맞춤 후에 신은 떠나고 자신만 자신으로 남았다. 신은 자신이 자신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진짜로 살아보려는 자는 자신에게 도달할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도달한 자라면 그가 신이다. 자신에게 도달한 자가 아브락사스다. 네가 신이다.



※‘데미안’ 북토크 내용은 광주일보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유튜브 : https://youtu.be/Z5uWMrWMBzY)



※11월에 함께 읽는 책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광주일보 11월 2일자 16면 참조> 입니다.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604238000707376315&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