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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 많이 힘들었어요.”
2020년 09월 23일(수) 00:00
한국환 장로
올해는 전 지구적 초유의 사건, ‘코로나19’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어 세계가 거의 마비되어 가고 있어 혼란스럽다. 그런 와중에 해외 입양됐던 한 여성이 부모를 찾아 내한했다가 통한의 눈물 흘리며 한국을 떠난 사연이 주목을 받았다.

“엄마, 저 많이 힘들었어요.” 지난 6월 그 이야기를 보도한 뉴스의 제목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입양됐던 한 여성이 아버지를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고 36년 만에 아버지를 찾게 된다. 주인공 카라 보스(한국명 강미숙) 씨는 1983년 11월 충북 괴산의 한 시장 주차장에서 발견되어(당시 두 살) 이듬해 미국 미시간주 한 백인 가정에 입양된다. 지극한 양육 아래 성인이 된 후 네덜란드인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는데 딸을 낳은 후 한국인 친어머니를 만날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딸이 두 살 되던 해, ‘우리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버리고 나서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까’을 생각하며 엄마를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입양 당시 서류에는 부모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유전자 정보를 등록하고 한국을 오가며 찾아 나선다. 결국 지난해 유전자 정보 대조로 아버지 친척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마침내 아버지를 찾았지만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지난해 말 자신이 친딸임을 인정받기 위한 소송에서 지난 6월 법원은 유전자 검사 결과 친생자라고 판결한다.

처음 DNA가 일치하는 이를 찾아냈지만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고 어떤 정보도 알려 주려 하지 않았다. “엄마를 찾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로, 수치스러운 자신들의 느낌이나 가족의 스캔들을 능가하는 것 아닌가? 그 부분에 내가 분노했다”고 강 씨는 소송했던 이유를 밝혔다. 강 씨는 마스크를 벗고 “엄마, 제 얼굴 아세요? 미안해 하지 말고 그냥 오세요, 만나고 싶어요”라고 어색한 한국어로 말했다.

하지만 한국의 사생활 보호법은 입양인의 경우 주소와 전화번호 등 친부모의 정보를 부모들이 동의할 때에만 얻을 수 있다. 이에 강 씨는 2016년 자신의 유전자 자료를 온라인에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생부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생부 오 씨를 찾아갔다. 그 가족은 강 씨의 존재를 부정했으나 며칠 후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적대적인 태도로 10여 분만에 대화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경호원 2명을 대동해 변호사 사무실에 왔으나 모자, 선글라스까지 착용하여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엄마에 대한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나는 내가 열었던 한국과 관련된 나의 정체성과 국가이자 사회인 한국에 문을 닫는다. 셀 수 없이 많이 상처받았고 거부당했다. 나는 이제 집으로 간다. 내 집은 암스테르담의 내 가족들과의 집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큰 상처를 입고 떠났다.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이 가장 필요했던 어린 시절에 해외로 입양되어 성장하며 겪어야 했던 세상의 온갖 풍파를 딛고 일어선 뒤 이젠 자신을 낳아 준 부모님을 찾아 나섰으나, 친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생사조차 모른 채 돌아서는 눈물의 강 씨 사진이 필자의 맘을 더욱 아프게 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국내 출생 이후 입양된 인원은 24만 8728명이다. 이중 67.5%인 16만 7864명이 해외 입양됐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입양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전체의 3분의 2는 해외 입양이다. 이렇듯 우리들이 손수 키우지 못하고 아픈 마음으로 해외로 보냈지만, 이제 성장하여 다시 혈육을 찾아 온 그들을 당시의 사정을 헤아리며 따뜻하게 맞을 수 있도록 우리들의 의식과 법적 시스템을 이제 되돌아봐야 한다.

가족을 ‘밥’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루 세끼 밥을 꼬박꼬박 먹어도 다음날 또 배고픈 것처럼 사랑도 꾸준히 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강 씨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약 4년 동안의 노력을 이루지 못한 채 눈물 속에 떠났다. 앞으로 관련 법이 개정되어 해외 입양된 사람들이 고국에서 혈육을 더 자유롭게 찾고 상면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