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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코로나19 이후의 교육
2020년 06월 25일(목) 00:00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는 1997년 포브스 인터뷰에서 “앞으로 30년 후면 대학의 커다란 캠퍼스는 유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대학은 미래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이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피터 드러커의 예언이 틀린 사례로 들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 19가 만든 교육 현황은 그의 예언이 현실화할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국제 수준의 여러 기업들과 국제 수준의 의료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국내 대학들은 순위를 들기도 민망할 정도로 국제 수준에서 크게 뒤떨어져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모든 현상에는 그 근원인 뿌리가 있는데, 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의 교육 시스템은 조선총독부가 짠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을 간섭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1908년 8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학부대신 이재곤에게 칙령 제62호로 ‘사립학교령’을 반포시켰다. 이재곤은 이완용과 함께 1907년 고종 황제를 폐위시키고 통감이 한국 정부를 지도하는 것을 명문화한 한일신협약 체결을 주도해 ‘정미 7적(賊)’으로 지탄받았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1910년 10월 7일 일왕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5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던 매국 친일파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내린 ‘사립학교령’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사립학교의 재산에 대한 것이다. 그 전까지 우리 민족의 교육 전통은 스승과 학생만 있다면 사랑방 하나만 있어도 학교를 개설할 수 있었다. 한데 이토 히로부미는 막대한 자본이 있는 사람만 교육 사업에 나설 수 있게 규제했다.

자본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 설립자나 운영자 그리고 교사들에 대해 까다로운 규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사립학교법 제8조는 “다음에 해당하는 자는 사립학교의 설립자, 교장 및 교원이 되지 못한다”고 규정했는데 그 중에는 ‘성행(性行)이 불량하다고 인정되는 자’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친일파 이재곤의 눈에 ‘성행이 불량하다고 인정되는 자’는 물론 반일 민족의식이 있는 애국지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때 사립학교가 각 군에서 설립되었는데 교과서를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술했으므로 나라가 망한 것을 분통하게 여겨 모두 비슷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 일본인들은 그것을 싫어하여 이재곤에게 그런 글을 쓴 사람을 제재하도록 칙령을 내렸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이토나 이재곤은 막대한 재산이 있는 친일파들만 교육 사업에 나설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완전히 강점한 이듬해인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반포해 교육을 더욱 옥죄었다. 10월 20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14호로 ‘사립학교 규칙’을 반포해 사학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교육을 담당하던 학부(學部)는 내무부 소속의 일개 학무국으로 격하되었다.

광복 후 귀국한 많은 애국지사들은 ‘이제는 교육구국’이란 모토로 대한제국 시절처럼 수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면서 이러한 구국 사업은 일제강점기처럼 억제되었다. 조선통감부 및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 규칙은 문장 몇 개만 수정된 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나라는 아무리 뛰어난 학식과 인격을 가지고 있어도 막대한 자본이 없으면 학교를 설립할 수 없고, 학교의 이사진이나 대학 총장 등은 모두 교육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학교 교사(校舍)가 없어도 대학을 설립할 수 있는 미국과도 아주 다르다. 일제강점기처럼 관에 순치된 대학만 존재할 수 있는 구조다. 그리고 바로 이 구조 때문에 한국 대학들은 국제 경쟁력이 없다시피 한 것이다.

코로나19가 만든 SNS 교육 현황은 이런 관치 교육의 사망 시점을 앞당기고 있다. 스승과 제자만 있다면 사랑방 하나만으로도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일제강점기 이전 우리 선조들의 교육 철학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신한대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