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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良善)의 삶
2020년 06월 19일(금) 00:00
임형준 순천 빛보라교회 담임목사
필자는 글을 쓸 때 글의 제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가 있다. 제목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비교적 글이 쉽게 써진다. 이미 글의 흐름을 파악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최근 칼럼을 쓸 때 제목을 정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순서대로 써 가고 있고 오늘은 6번째 성령의 열매인 ‘양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이 단어가 익숙하게 사용되지 않아 자칫 어렵게 생각할 수 있지만 깊이 연구해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내용이 가득하다.

타인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자비가 행동으로 실제화되는 것을 양선이라고 하는데, 자비라는 마음의 상태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양선이다. 사실 자비의 마음이 양선이라는 행동의 열매를 맺는 것은 그리 쉽거나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동안 우리를 이끌어 왔던 마음속에 머물러 있던 착함이 행동으로 전환하려고 할 때 동반되어지는 수많은 손익 계산과 이기적이고 인색한 습관 등 다양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자비라는 마음의 씨가 양선이라는 생명의 열매로 탄생하는 과정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혹한 겨울을 나는 몸부림의 과정처럼 새순과 열매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우리의 마음의 밭은 너무 많은 오류와 상처로 자비의 씨앗을 양선의 열매로 전환하기를 두려워한다. 조직이나 개인은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고, 프로세스를 개혁시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양선의 성경적 가르침은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24절 구절과 에덴동산의 이야기 속에서 추론해 볼 수 있다. 전쟁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류의 역사와 자본주의 시장 원리인 강자 생존의 치열한 경쟁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좀 더 냉정하게 현실의 삶을 평가해 보면 우리는 이미 양선이 상실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세상에 죄가 들어와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사는 ‘양선의 삶’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선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아직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뜻일 것이다.

양선은 모든 초점을 타인(이웃)에게 맞추어 사는 것으로 우선순위가 이웃이다. 즉, 자기중심적 삶을 타인 중심적 삶으로 옮겨 실천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성경은 가장 나약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상태를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라는 시적 표현을 통해 약한 이웃을 향하여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배려와 살핌으로 양선의 삶을 회복하길 촉구한다.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면 서두르지 않고 가능성을 믿고 기다려 주는 것, 무시하거나 무조건 비판하거나 무례히 행하지 않음으로 존중의 관계가 지속되어 서로 상처를 내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런 삶을 실천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내면을 혁명시키지 않고는 지속적인 양선의 삶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모든 관계 안에서 타인의 성향과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상대방의 현재의 처지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살피는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들은 언제부터 상실해 버렸을까? 조선 후기에 들어온 한국 기독교는 지독한 가난과 병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복 받는 신앙이 강조되다 보니 양적인 성장과 경제적인 부를 통해 풍족한 삶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양선의 삶에서 멀어진 결과를 가져왔다. 코로나 이후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사회적 약자를 향하여 낮은 곳으로 나아가 양선의 삶을 회복하여야 한다.

이제 신앙인들은 다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붙들어 내면의 변화와 더불어 이웃에게 관심을 두고 세상을 섬기며 실천하는 삶을 회복한다면, 비로소 양선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