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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2020년 06월 12일(금) 00:00
[황성호 신부·광주가톨릭사회복지회 부국장]
“행복하길 원하십니까?” “잘 살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 행복하고 싶고 잘 살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행복하다’는 것, ‘잘 살고 싶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잘 사는 것일까? 또 어떻게 살았을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어 본다.

행복의 가치 기준을 묻고 싶다. 혹자는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 있다. 우리의 행복은 무엇에 있다’ 하며 행복의 가치를 감각에 가두어 버리기도 한다. 우리가 행복의 가치를 좀 더 좋은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것에 둔다면 과연 그것으로 행복해 할까? 최첨단을 장착한 고급 신형 자동차를 타는 것에 행복의 가치를 두면 그것으로 정말 행복할까?

한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그의 아내와의 일화가 떠오른다. 부인이 명품 가방 하나 있으면 행복하기 그지없겠다고 하소연 하니, 지인은 부담스럽지만 큰마음 먹고 비싼 가방 하나를 구입해 아내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아내는 그 가방을 받고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내가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니, 가방만 명품이면 뭐 해. 그에 맞는 옷과 하이힐이 있어야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던 지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과연 지인의 아내는 가방에 맞는 옷과 하이힐을 맞춰 줬을 때,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을까 궁금하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이라며, 행복의 가치가 어디에 있다거나 무엇을 소유한다고 해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잠깐의 만족감과 기쁨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라는 장소와 ‘무엇’이라는 소유는 영원할 수 없고 감각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감각에 스스로가 속아 넘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으로 느끼는 행복감, 곧 감각을 통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것은 좋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엄청난 삶의 가능성과 원동력을 주는 단어를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필자가 6년 동안 칠레의 빈민가에서 선교사로 살면서, ‘어디’에 있고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님을 배웠다. 우리 돈 천 원이 안되는 칠레 화폐 500페소로 한 가족이 하루 먹을 빵을 구입할 수 있다. 빈민가의 삶은 지저분한 동네와 가진 것이 없는 아주 작은 삶이었다. 그러나 그 빵을 나누어 먹으면서도 항상 집안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칠레 빈민가였다. 이들은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또 풍성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것에 감사하고 또 그것을 나누면서 만족해 할 뿐이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가톨릭사회복지회로 발령 받기 전 영암 신북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할 때였다. 2018년 12월 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400포기의 배추를 김장했다. 김장을 위한 배추와 양념을 기부 받거나 신자들 집에서 조금씩 성당으로 챙겨 오셔서 김치를 담갔다. 정성스럽게 담근 김치를 아이스박스에 담으니 200여 개 정도가 되었다. 가톨릭사회복지회에 박스를 전달했다. 며칠 후 200여 박스의 김장 김치가 여러 시설에 배달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미혼모의 집, 지역아동센터, 카리타스 근로 시설 등등. 이 소식을 김장할 때 수고했던 어르신들에게 알려 드렸다.

이때 여든 가까이 되신 어르신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마음이 뜨겁고 행복했던 적이 없어라. 아따! 신부님 좋소야!” 당신은 나이가 많아 남을 도울 수 없을 거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당신이 직접 만든 김치가 그렇게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에 감동하신 것이다.

이것이 참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행복은 어디에 있고 무엇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3절의 말씀의 뜻을 묵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