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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과 재산에 대한 다산의 생각을 곱씹으며
2020년 05월 26일(화) 00:00
[백민정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다산이 격절(激切)한 심정으로 자식들에게 당부한 글이 있다. 사대부 집안이 관직을 잃으면 탕잔(蕩殘)하여 천족(賤族)에 뒤섞이니, 절대 경전 공부를 포기하지 말고 가정경제를 등한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녀에게 보낸 당부는 과거(科擧)와 경제(經濟)라는 두 키워드로 요약된다.

손자 때라도 어떻게든 급제해 관직을 얻어야 하고 과수와 원포를 경영하며 가능한 도시의 안목과 품위를 유지하라고 타이른다. 다산이 강조한 귀한 족속[貴族]은 기본적으로 관직을 얻은 자를 말하지만, 관직이 없다면 도(道)를 지키고 예(禮)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후자를 위해선 예를 수행하기 위한 경제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원포 경영, 뽕나무 재배, 양잠, 양계를 권했다.

다산은 평생 사족(士族)으로 살았고 사대부의 삶을 동경했다. 관료적 자의식이 강했던 그는 사족의 귀함을 잃으면 천류(賤流)로 떨어질 것이라 걱정했다. 사족의 성취와 유지는 다산의 가장 절실하고 내밀한 삶의 욕망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유배지의 다산은 아들에게 폐족(廢族)의 충군(充軍) 위험도 상기시킨다. 청족(淸族)은 군역도 면제받고 혼사도 이루지만 폐족은 그럴 수 없음을 염려한 것이다.

다산은 군역(軍役)을 비롯해 각종 국역(國役)을 면제받던 양반 사족층의 특권을 기대한 것일까? ‘경세유표’에서 어느 것 하나 썩지 않은 곳이 없다며 국정의 절박한 위기를 한탄한 다산은 사족층의 특권을 방기한 채 사회개혁론을 전개할 수 있었을까? 자신과 가족, 후손들을 예외로 보지 않으면서, 다산은 지배층으로서 사족의 역할과 책임을 자임할 수 있었을까? 성급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다산이 이 문제를 의식했고 깊이 고민했다고 본다.

다산이 살던 시대 사족층의 군 면역은 일반적이었는데, 다산은 관직 없는 사족의 군역 회피, 전직 관리 자손들까지 군역을 면제받던 상황을 개탄한다. 그는 관직 없는 어떤 사족도 국역을 져야 한다고 보았기에 자식들에게 충군의 가능성을 언급할 수 있었다. 다산은 현직을 맡은 자가 아니라면 전직 관리, 공경대부의 자손, 음서의 혜택을 입은 자 누구라도 군역의 책무를 져야 하고 군포(軍布)를 동등하게 납부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산은 사(士) 신분을 구직론(九職論)에 포함하여 병농일치의 군대를 편성하고, 사족이 혼인하면 부포(夫布)를 내도록 하고, 토지와 택지를 가졌다면 전세와 택포도 납부하도록 했다. 다산이 구상한 사회개혁론에서 사족은 양민들과 마찬가지로 부공(賦貢)을 동등하게 납부하는 자로, 현직에서 물러나면 누구나 군역의 책무를 짊어지는 자로 간주되었다. 다산이 생각한 상족(上族)으로서의 사족, 즉 귀한 족속은 양민이 지는 모든 국역에 동참하고 납세에 철저하며 가정과 향촌, 중앙에서 윤리적 지도자로서 자신을 엄격히 단속할 수 있어야 했다.

늦게 취업한 탓인지 나는 아직도 반전세를 전전하지만, 여전히 이재에 밝지 못하다. 갑자기 요즘 다산이 일순간 꿈꾸었듯 토지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으신 부모를 뵈면, 볕 잘 드는 따뜻한 집을 지어 드리고 싶고, 어머니가 화초도 가꾸시며 편안히 사실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불현듯 나에게도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폭등한 아파트값을 내려라, 종부세를 대폭 인상하라는 등 부동산 투기 억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가 어느 순간 부동산이 아니면 월급으로 도저히 집을 살 수 없고 돈도 벌 수 없는데 지금껏 나는 무엇을 했는가 싶은 후회도 든다.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 다산의 소망, 가족과 자녀에 대한 우려와 기대는 딴 사람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한편으로 나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갈망하고 한편으로 나는 사회적 대의를 고민한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없다면 다산에 대한, 혹은 타인에 대한 내 비판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공의(公義)에 기반한 사회개혁, 어렵지만 반드시 가야 하는 길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아야 하고, 위태롭지만 균형과 절제의 끈을 놓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