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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의 ‘소설처럼’] 지난하고 비밀스러운 자기 자신 되기
- 김병운, ‘아는 사람은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2020년 05월 21일(목) 00:00
코로나19를 두고 방역 당국은 이러한 평가를 했다.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치명적인 바이러스. 문장 그대로 이 전염병의 힘은 막강하여 30만 명의 희생자를 냈고, 의료 체계는 물론 세계 경제 전반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단 한 번의 락다운이나 도시 봉쇄 없이 비교적 효과적으로 바이러스를 제어해 온 우리 사회의 저력이 새삼 놀랍다.

5월 연휴를 앞두고 10명 이하로 떨어진 하루 확진자 숫자에 조금 들떴던 것도 사실이다. 마침 정부도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를 발표했다. 이대로라면 바이러스는 종식되고 잃었던 우리의 일상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우리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들의 경고를 무시했던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조금씩은 방심했는지도 모르겠다. 확진자 숫자가 떨어져 갈 즈음 기업과 유흥 시설이 몰려 있는 곳마다 사람이 넘쳐났다. 좁은 테이블에 붙어 앉아 식사를 하고, 그중 누구는 술을 마셨고, 또 누구는 노래방이나 클럽에 갔을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겠으나, 결과는 그 마음의 허술함을 배신하곤 한다.

이태원 클럽에서 시작된 바이러스의 유행은 다행히 대구 신천지나 구로 콜센타에서의 전염에 비해 그 강도가 덜했다. 아마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 등, 바이러스를 멀리하는 생활 습관이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코로나 이후 우리 사회의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도리어 막대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연대할 것인가, 혐오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질문이기도 하다.

이태원발 확진자와 접촉자에 대한 낙인찍기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방역과는 상관없이 해당 클럽 이용객의 성적 지향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고, 이는 K-방역이 자랑하는 ‘추적, 검진, 격리’의 모델에 큰 방해가 되었다. 바이러스는 성별과 인종, 빈부와 성적 지향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을 가르고 차별하는 것은 인간이다. 모두가 힘들 때 클럽에 간 행위는 마땅치 않으나, 지탄받아야 할 건 행위이지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수자의 존재가 필요에 따라 지워지고 때로 부각되는 것을 자주 봐 왔다.

신인 작가 김병운의 첫 장편소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는 ‘아웃팅’(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알려지는 것)의 두려움과 ‘커밍아웃’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명 배우의 이야기다. 어느덧 한국문학에서의 ‘퀴어 서사’는 더 이상 그 모티브만으로는 주목받기 어려워졌다. 이 소설의 미덕은 그저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자기 고백적 서술이 아닌 성공적인 캐릭터 형상화를 통해 펼쳐 보였다는 데 있다.

공상표에게는 엄마와 누나, 애인은 물론 직업적 욕망과 불안감도 있다. 그리고 조금은 다른 성적 지향이 있다. ‘조금은 다름’을 말하지 못해 예명 공상표, 본명 강은성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다. 그의 필모그래피의 빈 곳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자신-되기’의 지난하고 비밀스러운 과정이다. 때로 어떤 이의 과정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되고는 한다. 공상표, 아니 강은성처럼.

사회적 거리 두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연대의 힘을 믿어야 가능하다. 접촉의 행적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 진단을 받아야 한다. 전파의 우려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격리해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전염과 면역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자랑했던 방역 시스템이 남길 무리한 사생활 침해라는 부작용이 너무나 크다.

강은성의 연대는 사후적으로 일어난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커밍아웃이 그의 용기를 북돋는다. 또한 그만큼 사랑하던 사람을 잃고 나서야 힘을 낼 수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과연 강은성은 배우 공상표로서 커리어를 이어 나갈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이 된 이후에도 그에게 사람들은 손을 내밀까. 그리 되길 애써 바랄 뿐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