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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한의 주거생활
왜 마한의 마을유적은 고분유적과 달리 찾아가 볼 수 없는가?
지하에 숨어있어 발굴 통해 모습 드러내
확인됐지만 개발이 우선, 대부분 파괴
2020년 04월 22일(수) 00:00
담양 태목리에서 발굴된 마한 마을 유적의 일부. (2005년 호남문화재연구원 발굴)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8> 마한의 주거생활



지금까지 7편의 글을 통해 마한 사회의 출범에서부터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또한 530년경까지 마지막 마한 사회가 지속되었던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마한문화권을 설정해야 할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이를 통해 백제문화권, 신라문화권, 가야문화권과 상응하는 역사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한편 앞으로 지역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제부터는 마한문화권을 특징지을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면모들을 하나하나 살펴 나가보도록 하겠다.

◇마한의 주거생활에 대한 문헌기록

모든 개인이나 집단을 특징짓는 문화 요소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衣, 食, 住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이 가운데 고고자료를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은 일상 생활과 직결된 집이다.

집의 구조는 근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일상 생활 뿐만 아니라 기후와 건축재료 등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지역별 차이가 컸으며, 중국의 ‘삼국지’나 ‘후한서’ 등에는 자신들의 집이나 일상 생활과 차이가 컸던 주변 사회의 주거생활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남조 송나라 범엽(范曄)이 저술한 ‘후한서’ 동이열전의 내용이 시기적으로 통하면서 비교적 자세하다. 마한의 큰 나라는 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가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고,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남녀 구별이 없고, 출입하는 문은 위쪽에 있다고 하였다.



담양 태목리 유적에서 발굴된 화재 집자리.
◇발굴을 통해 확인된 마한 살림집의 구조

마한의 살림집은 한변 6m 가량의 네모난 바닥에 4개의 기둥을 가진 반움집이 많다. 2000년에 발굴된 공주 장선리 유적은 특별한 예로서 2~3개의 지하 구덩이가 연결되어 있는데 출입부, 바깥방, 딸린방 등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중국 사서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고, 2001년 9월 11일 ‘공주 장선리 토실유적’이란 이름으로 국가사적 제433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공주 장선리 유적이 높이 평가되었던 것은 외부 냉기를 차단하는 특별한 기능을 가진 살림집이라는 견해 때문이었는데 일부만 타당할 뿐이다. 연해주, 사할린, 홋카이도 등 한겨울 추위가 심한 지역의 살림집은 외부 냉기를 차단하고 실내 온기를 보존하기 위한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공주 장선리 구조물과 크게 다르다.

공주 장선리 유적은 규모나 구조에 있어 사람들이 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마한의 살림집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다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렵다. 유적의 위치나 구조, 규모 등으로 미루어 식재료를 저장하였던 지하 창고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적 명칭이 ‘공주 장선리 유적’으로 바뀌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한 살림집의 내부 생활

살림집의 내부 생활에 대해서는 ‘후한서’에 남녀 구별이 없다는 단편적인 내용이 보인다. 내부가 당시 중국 살림집과 달리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점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는 내부 공간은 출입구와 부뚜막을 기준으로 남자공간과 여자공간이 뚜렷이 구분된다. 실내활동 관련 공간과 실외활동 관련 공간으로도 구분된다. 이와같은 공간 성격은 서울 암사동 유적과 같은 신석기시대 움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북방 초원지대에서는 마한 살림집과 비슷한 크기의 게르(유르트, 파오)에서 5~6인의 가족이 생활하고 있지만 내부 공간은 남녀와 용도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

살림집 내부 활동과 관련되는 시설물은 부뚜막이 대표적이지만 바닥은 신석기시대부터 점토를 바르고 불을 피워 단단하게 하였고 청동기시대에는 삿자리를 깔거나 침상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부뚜막은 점차 외줄구들과 연결되어 난방 시설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시설은 기원전에 동북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후 빠른 속도로 남부지역으로 파급되었으며 온돌로 발전하였다.



광주 동림동 유적에서 발굴된 집자리. 네 기둥자리에 조사원들이 서있다. (2004년 호남문화재연구원 발굴)
◇마한 마을의 구조

‘후한서’에는 마한 54개 나라들이 큰 나라는 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가를 가지고 있고 각 나라에는 국읍을 비롯하여 별읍, 읍락, 촌락 등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조사를 통해 밝혀진 마을의 규모는 수십호에서 수백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기록에 나오는 국읍, 읍락, 별읍, 촌락 등 위계화된 사회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마을 전체가 조사된 예는 많지 않지만 마을을 감싸는 큰 도랑을 가진 것도 보이며 중심부에 큰 광장을 가진 마을도 확인된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조사된 마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보여주는 곳은 담양 태목리 유적이다. 유적 전체가 발굴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3~5세기에 걸쳐 200여년 계속되면서 수백호가 공존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어느 마한 소국의 국읍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한 마을의 전체 모습은 일본 규슈 요시노가리 유적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유적은 마을 전체에 도랑과 울타리가 둘러져 있고, 마을 내부는 광장을 중심으로 최고 지배세력의 거주지와 창고 구역이 별도의 도랑과 울타리로 구분되어 있다. ‘후한서’에 등장하는 히미코가 이끌었던 야마타이의 국읍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왜 마한의 마을은 찾아가 볼 수 없을까

마을 유적은 고분 유적과 달리 땅 속에 숨어있기 때문에 찾아내기 어렵다. 개발지역으로 확정된 지역에서는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되어 발굴조사로 이어지지만 보존되는 것은 공주 장선리 유적의 경우와 같이 희귀하거나 극히 일부분에 국한된다.

광주 신창동 유적은 기원 전후경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마을 유적이지만 호남고속도로로 인해 두동강이 나 있다. 3~5세기를 대표하는 담양 태목리 유적은 고속도로 교차로로 변해 버렸다. 5~6세기를 대표하는 광주 동림동 유적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광주 하남동 유적은 공업단지로 바뀌었다.

이와같은 현상은 경주, 부여, 공주, 익산을 고대도시로 지정하고 ‘고도보존및육성에관한특별법’으로 관리하는 것과는 대단히 큰 차이를 보여준다.

다행히 광주 신창동 유적은 고속도로 좌우 지역이 보존되어 있으므로 나중에 고속도로를 확장 때가 되면 우회는 어렵더라도 고속도로를 지하에 설치하여 동강난 지역을 연결하는 한편 요시노가리 유적과 같이 장기적으로 발굴하면서 복원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땅 속에 숨어있는 마한의 마을들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지만 영암 시종이나 나주 반남·다시 지역과 같이 거대한 고분들이 밀집된 지역에서 그 주인공들이 살았던 마을 유적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언젠가 찾아진다면 마한 국읍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