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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아, 슈리성
2019년 11월 05일(화) 04:50
지난 10월 31일, 오키나와의 슈리성(首里城)이 전소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1989년부터 올해 초까지 30년간 정성을 기울여 복원한 류큐왕국의 혼이 불타 버린 것이다. 슈리성 곳곳에 화마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었던 여러 장식들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아연실색했고, 많은 한국인들도 10여 년 전 남대문 화재를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필자는 슈리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직전인 1999년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는데, 가장 놀랐던 것은 슈리성 남문의 ‘예를 지키는 나라’라는 표현이었다. 이 수례문은 조선의 숭례문을 떠올렸다. 슈리성 정전에는 ‘중산지토’(中山之土)라는 청나라 강희제가 하사한 편액이 걸려 있었다. 중화질서를 나타내는 상징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류큐는 조선이 건국된 지 14년 후인 1406년 쇼(尙)씨에 의해 통일 왕국으로 출발하였고, 슈리성은 이 왕조의 궁궐로 지어졌다. 조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받은 지 17년 후인 1609년, 류큐 왕국은 지금의 가고시마에 근거를 둔 사쓰마번의 침략을 받았다. 사쓰마번은 중국과의 중계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이 조그만 왕국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류큐는 중국과 사쓰마번에 양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근대의 파도가 류큐 왕국을 덮친 것은 1853년이다. 미국의 페리 제독은 상해를 떠나 류큐의 나하에 입항했고, 이듬해인 1854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것은 류큐가 형식적으로 독립 왕국임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류큐의 불행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다가왔다. 1872년 일본은 중국 황제가 했던 것처럼, 류큐 국왕을 번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879년, 일본은 이른바 류큐 처분을 통하여 번을 폐지하고 일본의 한 지방임을 나타내는 현을 창설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하였다. 류큐는 오키나와가 되었으며, 류큐의 국왕은 귀족으로 강등되고 인질로서 도쿄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이 시기를 상세하게 연구한 류큐 대학의 나미히라 쓰네오(波平恒男)교수는 ‘류큐 처분’이라는 용어는 일본의 입장만을 반영한 것이라 했다. 보다 객관적으로 말하려면 조선 병합이라는 용어처럼, 류큐 병합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류큐를 병합한 후, 1894년 청과의 전쟁을 통하여 대만을 식민지화하였고,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이어 영친왕을 볼모로 잡아갔고, 결국 조선을 병합하였다.

일본은 만주 침략과 함께 내부의 식민지를 보다 공고한 제국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황국신민화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요한 역사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식민지 주민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슈리성을 1933년 국보로 지정했고, 조선총독부는 그 이듬해에 남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하였다. 하지만 슈리성의 언덕 부지는 일본군 제6사단의 사령부가 차지하여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1945년 5월, 미군은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시작하면서 함포 사격으로 사령부와 슈리성을 완전히 파괴되었다. 류큐의 혼을 담은 문화재들이 사라진 것이다. 이 사령부의 위안부 시설에서 발굴된 샤쿠(콘돔)가 나중에 한국의 ‘나눔의 집’ 전시관에서 전시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미군 점령하에 오키나와에는 류큐 정부가 성립하였고, 폐허가 된 슈리성 터에는 류큐대학이 들어섰다. 1958년 수례문이 복구되어 정전의 복구를 기다리게 되었다. 일본의 잠재 주권만이 인정되고 실질적으로 일본과 분리된 오키나와는 베트남전쟁의 와중에서 1972년 일본으로 ‘복귀’하였다. 1979년에 류큐 대학이 이전한 후 오키나와 현과 일본 정부는 슈리성 재건계획을 세웠다. 1989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되어 1992년 정전과 남전, 북전 건물이 완공되어 공원이 되었고, 관광객을 맞기 시작하였다. 2017년에는 285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

지난 이십여 년간 슈리성은 동아시아 평화의 상징이었다. 이를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두 손 모아 빠른 복원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