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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호 영암 신북성당 주임신부] ‘향원’(鄕原)이라는 사람, 그는 누구인가?
2019년 07월 26일(금) 04:50
자기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들의 행태를 보면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함께하지 말자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위해서 어떤 특단의 조치가 요구되는데, 이들은 이 대처에 동의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인 동의는 없고 말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한다. 사람들의 평판과 외적인 모습에서 이들의 말과 행동은 충직하며 신실하고 고결함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이들의 충직함, 신실, 고결함에서 답답함과 좌절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속내를 가려기 위한 치장으로 거짓과 같다.

이솝 우화의 ‘박쥐 이야기’처럼 양다리 걸친 사람일까? ‘박쥐 이야기’는 이렇다. 숲에서 새들과 동물들 사이에 아주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동물들이 수가 많고 몸집이 크다 보니 박쥐는 동물들이 이길 것 같아 보였다. 박쥐는 날개를 접고 동물들 편에 섰다. 그러나 약세를 보였던 새들에게 독수리가 합세하면서 새들이 이 싸움에서 이길 것 같았다. 박쥐는 다시 날개를 펴고 새들과 함께 동물들을 공격했다. 결국 새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새들은 양다리를 걸친 박쥐의 행태에 대해 재판을 열었다. 새들은 박쥐의 털을 다 뽑아 빛이 없는 어두운 동굴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 벌을 받게 했다.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 상황에 따라 날개를 접거나 펴는 그런 사람,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세상이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초원복집 사건이 떠오른다.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살아남아 나라는 물론 그들이 추대했던 사람을 오히려 망쳐버렸다.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위치는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사회 정의의 실현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사이비 지식인’ 즉 ‘향원’(鄕原)이다. 공자는 “향원은 도덕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가르침을 받은 맹자는 “그들은 말이 또 얼마나 번드르르한가! 말은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입만 열면 옛 성인을 운운한다. 그 행동이 또 얼마나 그럴듯한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지금 세상을 위해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닌가! 라는 태도로 은밀히 세상에 영합하는 자가 바로 향원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맹자의 제자가 “일정 집단 내에서 독실한 인물로 통하고 있는 이상, 어딜 가든 항상 독실한 인물로 통할진대, 공자가 왜 그런 인물을 ‘도덕의 적’으로 규정했습니까?”라고 묻는다.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향원은 비판하려고 해도 꼬집을 데가 없고 비난하려고 해도 나무랄 데가 없다. 그처럼 속된 무리의 논리에 동화하고 세속의 부패에 화합하고 있는지라, 그 처신은 충직하고 신실한 것처럼 보이고, 그 행실은 염치가 있고 고결한 것처럼 보여서 뭇 사람들이 다 그를 환호한다. 그러나 그는 늘 그 스스로 항상 옳다고 여기며 세상에 도를 실현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도덕의 적’인 것이다.”

향원은 충직함, 신실, 염치, 고결함 등의 덕목으로 자신을 치장한 다음 주위로부터 인정받는 사회적 위치를 획득하여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데에만 몰두할 뿐이다. 이 향원의 존재 방식은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과 좌절을 가져다 준다. 자기만을 위하니 모두의 적이며 ‘도덕의 적’인 것이다.

지금 일본의 행태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본보다 우리 안에서 누구 때문에 참을 수가 없다. 은인들과의 대화에서 ‘향원(鄕原)’이라는 단어를 듣고 검색해 보니, 그는 사이비 지식인이고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존중받는 존재였다. 협치를 이야기할 때 함께 잘못된 것에 대항하자고 할 때,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기득권과 같은 자리를 절대 내주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 이런 자들 때문에 우리가 고통과 좌절감을 맛보았고 지금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러분은 ‘향원(鄕原)’이라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되십니까? 누가 떠오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