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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의 ‘소설처럼’] 죽은 사람을 위해 - 조지 손더스 ‘바르도의 링컨’
2019년 04월 18일(목) 00:00
2017년 맨부커상 수상작 ‘바르도의 링컨’(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2018)은 영어권 소설에서는 이제껏 주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세계를 그린다. ‘바르도’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일컫는 불교 용어라고 한다.

이성과 합리성을 근간으로 태동한 근대 문학, 그중에서도 근대성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장르에서 이토록 비이성적이고 불합리적인 배경과 모티브라니…. 가히 ‘읽는 책이 아니라 경험하는 책, 소설의 경계를 확장하는 걸작’이라는 찬사가 그들에게는 허튼소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동양적 사고에서 이승과 저승 사이의 ‘그곳’은 희박하거나 참신한 개념은 아니다. 우리는 이승에서의 한을 풀지 못해 저승에 도달하지 못한 것들을 ‘귀신’이라 부르고 그들을 어르고 달래는 이야기를 구전으로든 매체로든 듣고 전달해 왔다. 멀리는 ‘전설의 고향’에서부터 가까이는 ‘신과 함께’에 이르기까지 죽어도 죽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바르도의 링컨’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따라서 발상의 기발함에 호들갑스레 놀란 원어민 독자에 비해 동아시아의 한국 소설 독자들이 이야기의 메시지에 보다 집중하여 읽을 수 있는 아이러니한 가능성이 발생한다.

‘바르도’에는 삶에 미련을 다 버리지 못한 영혼이 모여, 죽음을 받아들이길 유예하며 삶으로의 복귀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다. 열한 살 소년 윌리는 그런 바르도에 새롭게 등장한 영혼이다.

소년은 미합중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셋째 아들이다. 아들을 잃은 비탄에 잠긴 대통령은 묘지에서 아들의 시신을 꼭 껴안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거대한 공적 일상으로 복귀한다. 윌리는 아빠가 건넨 그날의 약속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 아빠를 기다리며 저승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승에 가지 못하는 영혼에게 세상은 고통의 공간일 뿐이다. 어리고 순수한 영혼일수록 이곳이 아닌 저곳, 바르도가 아닌 천상에 있어야 하지만 윌리는 고집을 부린다. 바르도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한스 불먼, 로저 베빈스 3세, 에벌리 토마스 목사는 불쌍한 소년 윌리를 어떻게든 저승으로 보내려 하지만, 일은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르도의 영혼들은 힘을 다해 링컨과 윌리의 마지막 만남을 이뤄 내려 한다. 소년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대로 애도받을 수 있도록. 진정으로 추모하기 위하여.

‘바르도의 링컨’은 영적인 존재나 유령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하더라도, 쉽게 읽히는 작품은 사실 아니다. 소설의 화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당시의 신문 기사, 책, 서간문이 소설 곳곳에 자리하며 비이성적인 이야기의 이성적 토대를 구축한다. 마흔 명이 넘는 영혼은 제각각의 사연과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소설을 입체적이게 하면서 동시에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는 것을 방해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 읽기를 중간에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멈춰서는 안 된다. 소설 후반부에 전개되는 거대한 감동을 소설 독자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소년을 향한 모두의 애도. 소설은 사람이 사람을 애도하고 추모함이 무엇인지를 끈질기게 좇는다. 무엇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음을 받아들이게 할 것인지, 산 자가 죽은 자를 어떻게 도울 것인지 묻는다. 남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짐작한다. 우리도 그것이 궁금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는 애도의 방법과 범위에 대해 숙고했다. 결론은 나지 않은 듯하다. 어느 전직 국회의원은 세월호 유가족과 관련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징하게 해 처먹는다’라고 말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애도란 무엇이고, 도리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판이다. 사람이 아닌, 바르도의 유령들이 차라리 나은 사람이라는 게 우습고, 무섭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