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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사법 기관의 근본적 개혁
2019년 03월 28일(목) 00:00
지금 경찰은 버닝썬 사건으로, 검찰은 김학의 전 법무차관 사건으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국정 농단 사건과 관련되어 법원 또한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사회 정의를 실현해야 할 사법 기관들이 거꾸로 정의 실현을 저해하는 기관이 되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역사를 통해서 해답을 찾는 것이 좋다. 먼저 조선의 사법 제도와 비교해 보자. 우리 국민들은 지금의 사법 제도가 조선의 사법 제도보다 나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먼저 조선은 수사권을 여러 기관에 분산시켰다.

지금의 검찰 비슷한 조직이 사헌부였다면 의금부는 지금 도입하려는 공수처와 비슷하다. 사헌부·의금부 외에 지금의 법무부 격인 형조와 경찰 격인 포도청도 수사권이 있었다. 선조들은 수사권을 왜 여러 기관에 주었을까? 그래야 한 기관의 묵인 내지 방조로 사건이 덮이는 것을 막고 사법 기관끼리 서로 견제시켜 부패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 덕분에 조선에서는 버닝썬 사건이나 김학의 사건 같은 것이 발생하기 힘든 구조였다. 포도청이나 사헌부에서 사건을 덮을 경우 바로 의금부나 형조 등이 나서서 관련 관원들을 구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했다.

또한 판사 역할을 하는 사율원의 판사들은 잡과(雜科) 출신의 중인 신분이었다. 그래서 1895년 갑오개혁 때 당시 법원이었던 평리원(平理院) 내에 법관 양성을 위한 법관양성소가 설치되었을 때 양반 출신들이 기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사는 고시 격인 문관 출신들이 하게 하고 판결은 중인 잡과 출신들이 내리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바 재량권 따위를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조선의 판사들은 해당 사건에 대해 기계적 판결을 내렸다. 특정 형벌에 똑 떨어지는 법 조항이 없을 경우 가장 근사한 조항을 끌어 판결하는데 이를 비율(比律)이라고 했다. 재량권은 오직 국왕만 갖고 있었다.

이런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피혐(避嫌)과 상피제(相避制)까지 마련했다. 피혐이란 본인에게 털끝만 한 하자가 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혐의가 있다는 비판을 받으면 즉각 물러나는 제도였다. 상피제는 친족이나 친한 사람이 같은 부서나 유관 부서, 요즘 말로 이해 충돌 부서에 근무하지 못하게 한 제도였다.

성종 10년(1479) 대사헌 어세겸은 동생 어세공이 병조판서가 되자 스스로 사직했다. 사헌부는 백관에 대한 규찰권이 있는데, 동생이 무관에 대한 인사권이 있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므로 사정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권력 기관들은 내부 문제에 엄격했다. 같은 부서의 인물이라도 혐의가 있을 경우 사정없이 탄핵했다.

태종 17년(1415) 8월 사헌부에서 같은 사헌부 집의(執義) 권상온(權尙溫)을 탄핵한 적이 있다. 권상온이 다른 관직에 있을 때 금주령 중인데도 손님 및 상기(上妓) 몇 명과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태종은 즉각 형조에 명해서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해 보고하게 하였다.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법권이 있는 기관 내의 부정을 막지 못하면 나라 자체가 무너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내부 비리를 숨기기도 힘든 구조지만 이를 숨겼다가 드러나면 더 큰 벌을 받기 때문에 숨길 수도 없었다.

조선이 500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유지하면서도 그다지 큰 권력형 부정 사건이 없었던 것은 이런 이중 삼중의 제어장치 때문이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모두가 선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대해야 하지만, 제도를 만들 때는 인간이 극도로 악하다는 전제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악한 품성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마련했던 것이다.

지구상 어느 후진국에서도 보기 힘든 온갖 불법과 부정과 비리를 매일같이 목도하는 우리 사회.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즉 현 사법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조직하지 않을 경우, 우리 나라가 이 때문에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신한대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