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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만세현장을 가다] <5>일제에 항거한 호남의 애국정신
광주서 발한 ‘만세 불꽃’ 전남으로 뜨겁게 번졌다
치열하게 의병활동 펼쳤던 호남, 3·1 만세운동으로 열기 이어
3월 10일 광주천 부동교 아래 첫 거사…장성·담양 등서 ‘만세’
광주·전남 아우르는 3·1 만세운동 역사 체계적 정리 과제 남아
2019년 03월 19일(화) 00:00
독립운동가들의 위패가 모셔진 장성 삼일사.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년)에 호남인들은 분노했다. 한말 의병들의 전투현황(1908~1909)을 살펴보면 전남에서 821회(참가의병 2만8123명), 전북에서 492회(1만5536명)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국 3714회(12만1360명)의 35.3%에 달하는 수치다.

일제는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는 러일전쟁 때보다 많은 군대를 의병 토벌에 투입했다고 알려졌다.

1910년 을사조약이 맺어지며 나라를 빼앗긴 호남인들의 뇌리에는 일제 탄압에 대한 상처가 자리잡았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1919년 호남은 의병투쟁의 주축이었던 유생과 천도교 세력이 크게 꺾이며 만세운동을 이끌 동력을 상실했다. 실제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독립연구사’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3·1운동 시위 횟수는 전북이 39회, 전남이 44회로 북한을 포함한 전국 13개 도에서 최하위였다.

지난 1월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일제강점기 수형인명부’ 전수조사에서도 독립운동(의병활동·만세운동) 관련 수형자 5323명 중 호남 지역이 1985명으로 가장 많았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호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유생과 천도교가 빠진 자리는 기독교인이 채웠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지역 인재들은 기독교 사상의 평등주의를 몸에 익혔고 만세운동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했다.

격문을 읽었던 함평 문장면 3·1운동기념지.
◇광주에서 촉발된 만세운동…전남 전역으로 확산=호남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광주다.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 국민 80%가 농사에 종사한 만큼 장날을 이용해 거사를 준비했다.

1918년 12월 일본에서는 광주 출신 정광호 등 한국인 유학생들이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을 결의했다.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열린 송년회 겸 웅변회에서 정광호와 나주 출신 김현준은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서를 발표를 할 것을 제일 먼저 주장했다.

정광호는 앞서 이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가지고 와 서울에서 최남선 등을 찾아 도쿄 2·8 선언과 때를 같이 해 국내에서도 거사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확실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정광호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광주 출신 박일구·최정두·김범수 등을 만나 광주에서만이라도 거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은 서울과 맞춰 3월 1일 이었다.

같은 시기 서울에 있던 김필수 목사는 3·1독립운동준비측으로부터 광주거사에 대한 위촉을 받고 광주에 내려와 최흥종 장로와 김복현 등을 만나 의논했다.

광주거사는 최 장로와 김복현이 맡기로 했으나, 최 장로가 3월5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돼 계획이 틀어졌다. 급히 광주로 돌아온 김복현은 숭일학교 교사인 김강, 최병준, 삼합양조장 멤버인 황상호, 강석봉, 최한영 등과 광주거사에 대한 준비를 의논하고 각기 담당부서도 정했다. 거사일은 3월8일이었지만 준비와 연락 부족 등으로 3월10일 현 부동교 아래 광주천변에서 열리는 작은 장날 오후 3시 호남의 첫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함평 만세운동 계획 장소로 쓰였던 낙영재.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직원이었던 황상호·흥덕주·장호조는 ‘조선독립광주신문’을 만들어 배포하며 만세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궜다.

광주에서 불꽃이 일어난 만세시위는 담양·장성 등 주변지역으로 번지며 전남지역 전체를 뜨겁게 타올랐다.

장성군 삼서면 소룡리에 살던 송주일은 1919년 3월 8일 광주시 양림동에 사는 친척 송흥진으로부터 만세시위를 촉구하는 서신을 받고 3월 10일 광주 만세운동에 맞춰 마을 기독교인 70여명과 만세를 외쳤다. 화전놀이 날(음력 3월3일)이었던 4월3일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사람들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에서 일본인들에게 항의했다. 일본 헌병대가 무력 진압하자 장성사람들은 추적이 어려운 봉화시위로 바꿔 만세 운동을 이어갔다.

광주 첫 항일 만세운동 장소로 꼽히는 부동교.
장성에서는 6차례의 시위가 있었고 참가인원은 15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의 진압에 의해 사망자는 19명·부상자는 15명·검거자는 15명이나 될 만큼 격렬했다.

담양 청년들도 광주 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거사를 준비했다. 정기환 등 청년들은 3월18일 담양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양각산에 숨어 제작했다. 격문에는 조선인을 학, 일본인을 황새에 빗대 “황새가 날아와 학의 둥지를 빼앗아 1700여 학이 비탄에 젖어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돼 만세운동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20년 1월 23일 창평면에서 제대로된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향토사학자들은 무산됐던 담양읍 시위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다.

함평의 만세 시위 양상 또한 장터를 중심으로 청년층이 주도했다. 함평군 문장면민들은 장날인 4월8일 시위를 진행시켰고 태극기 1600장, 격문 등을 뿌렸다. 오전부터 밤까지 이어진 시위는 격렬했고 주동자 24명은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당했다. 1년 뒤인 조사현은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자 함평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또 만세를 부르다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목포의 3·1운동은 광주와 양상이 비슷하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파한 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은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운동의 중심이 돼 펼쳐졌다.

목포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시도된 날은 1919년 3월21일이지만 신문 보도만 있을 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대대적인 시위는 함평과 같은 4월8일 일어난다. 광주에 있던 남궁혁은 죽마고우인 박상렬을 찾아 2·8독립선언과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전하며 서울 시위 계획에 대해 알렸다. 이들 목포 만세 시위를 결의하고 오도근, 김영주, 박상렬·상술·상오 3형제 권영례, 오재복, 이금득 등 동지를 모았다.

같은 기간 양동교회에서는 이경필 목사와 함께 장로 곽우영, 서기견(서상봉), 서화일, 박여성, 박복영, 양병진, 강석봉 등도 시위 계획을 세운다. 거사 날짜는 남궁혁 등과 함께 하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준비는 각자 하기로 했다.

거사 당일 오전 10시 양동교회 교인, 정명여학교·영흥학교 학생, 시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총참모 역할을 맡았던 박상렬이 체포되며 분위기가 꺾였다. 당시 80명이 구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연행된 박상렬은 거꾸로 매달아 물을 붓는 고문 등을 당해 불구의 몸이 됐고 동생 상술은 정신 이상이 생겨 훗날 자결했다.

1983년에는 정명여고 선교사 사택 보수공사 도중 천장에서 독립가, 3·1독립선언문, 2·8독립선언문, 격문 등과 함께 ‘조선독립광주신문’이 발견돼 주목받았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유일한 원본이다.

목포 양동교회
◇광주·전남 3·1운동의 남겨진 과제=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았지만 광주·전남 지역의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더디기만 하다. 체계적인 연구자료는 전무할 뿐 아니라 자료마다 지명, 인명이 틀린 경우도 다수다. 심지어 첫 만세시위 장소도 정립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나온 지역 3·1운동 관련 자료는 옛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의 ‘만세 60년’ 특집기사(1979년 1월 6·8일자)와 ‘숭일의 뿌리’ ‘숭일 90년 약사’ ‘광주시사’ ‘양림교회 100년사’ ‘광주 YMCA 90년사’ ‘수피아 100년사’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100년사’ ‘광주·전남독립운동사적지’ 등이다. 옛 전남일보의 특집기사를 비롯한 자료 대부분 구술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같은 사람인데 기록마다 이름이 다르는 등 불확실한 내용이 많아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또 ‘광주시사’ 등에서는 광주청년들은 1919년 3월6일 남궁혁의 집에서 거사를 논의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정작 남궁혁의 행방은 나와있지 않았다. 또 다른 기록은 남궁혁이 목포 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야 비로소 퍼즐이 맞춰지는 상황을 고려하면 광주·전남을 아우르는 3·1운동 연구도 수반돼야 한다.

노성태 국제고 역사교사는 지난 2월 열린 3·1혁명 100주년 학술세미나를 통해 광주 첫 만세운동 장소를 부동교가 아닌 광주교 밑으로 지목했다. 최흥종이 경찰에 붙잡힌 날은 기존에 알려진 1919년 3월1일이 아니라 3월5일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선독립광주신문’을 만든 제중원 직원 황상호가 크게 부각됐지만 그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지난 1995년 심사에서 황상호는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삼선노회 이사에 이름을 올린 사실이 드러났다. 국민정신총동원이란 태평양전쟁 조선인 강제 징집을 의미한다. 황상호는 20년 사이에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모한 것이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규명돼야 한다. <끝>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