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김정남 언론인] 신명 김덕수
2017년 10월 31일(화) 00:00
올해로 김덕수가 광대가 된 지 60주년이 된다. 다섯 살 때인 1957년, 조치원에서 남사당의 난장축제가 열렸을 때 남사당 아저씨들이 김덕수를 안아 그들의 어깨 위에 새미로 세웠다. 김덕수는 어머니의 흰 광목천을 목에 걸치고 어른의 어깨 위 맨 꼭대기에서 앉고 일어서기,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얼마 전 나는 김덕수로부터, 그가 광대로 출발했던 바로 그날의 사진을 찾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사당패는 조선 후기에 자연 발생한 민중놀이 집단으로 전국을 돌며 놀이마당을 펼쳤는데, 그 종목은 크게 여섯 가지로 풍물 농악과 접시를 돌리는 버나, 땅재주 부리는 살판, 줄타기하는 어름, 탈놀이 덧뵈기, 꼭두각시 덜미 등이 있다. 이들 남사당 놀이패들은 농번기를 이용, 신명 나는 굿판을 벌여 주며 백성들의 흥을 돋워 주었다. 꼭두쇠를 중심으로 그들의 서열 조직은 엄격하고 일사불란했으며 추운 겨울이 되면 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김덕수의 아버지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뒷날 박첨지 놀이로 인간문화재가 된 양도일 아저씨는 풍물패 중에서도 장구 실력이 으뜸이었다. 아저씨가 장구를 들면 김덕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궁채와 열채를 들고 달려들었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주막집(목로방)에 홀로 남겨질 때면 김덕수는 미친 듯이 장구를 치며 벙거지를 돌리곤 했다. 일곱 살 때인 1959년 김덕수는 전국농악경연대회에 나가 ‘난다 긴다 하는’ 전국의 풍물패들을 제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사물놀이의 탄생



이후 김덕수는 선택된 남사당패의 일원이 되어 용산 미8군 장교클럽 등을 돌며 순회 공연에 나섰다. 공연을 마치면 출연료를 미국 달러로 받았다. 이때부터 김덕수는 우리의 신명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울려퍼지는 그날까지 장구채를 놓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광대로서 걸판지게 한 평생을 잘 놀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매우 전향적인 조치이기는 했지만, 무형문화재 지정이 정부의 문화 정책이 되면서, 남사당과 같은 예인 집단의 해체가 가속화되었다. 보존 위주로 가는 정책하에서 더 이상의 유랑은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 1970년대에 들어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삶과 일터에 그대로 녹아 있던 전통놀이는 그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학가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에 동원되었던 꽹과리와 북·장구·징은 혹심한 탄압과 압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1978년에 건축가 김수근은 그가 설계한 공간사랑에서 정기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문화 공연을 기획했다. 전통예술도 그 공연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때 민속학자 심우성의 제안으로 사물 악기로 앉아서 연주하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것이다. 꽹과리·징·장구·북의 사물놀이가 탄생한 것이다. 사물놀이란 이름도 심우성이 작명한 것이다.

남사당 출신 김용배가 꽹과리를 치고, 피리 전공자였던 이종대가 북을 맡았다. 그리고 해금 전공자이던 최태현이 징을 치고 김덕수가 장구를 맡아 웃다리 풍물가락을 연주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마당에서 하던 남사당놀이가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사물놀이로 재탄생한 것이다. 남사당의 신명을 이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마당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공연장으로 돌아왔다. 이후 사물놀이는 여러 사람의 걸출한 예인들을 맞고 또 보내면서 계속될 수 있었다.



걸어 다니는 국보



이로부터 사물놀이는 급격하게 퍼져나간다. 여기에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도움이 있었다. 물론 그 한가운데는 김덕수가 있었다. 사물놀이를 세계화하고 확장하는 데는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 있던 수잔나 M. 삼스탁이 큰 힘이 되었고, 전통예술을 시대에 맞게 체계화시키는 데는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4년 충청남도 부여에 사물놀이 한울림교육원이 세워지면서 공연이 반이면 교육 또한 국내외로 반이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민족적인 것이요,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사물놀이가 그 소리와 신명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사물놀이의 소리가 울려 퍼지면, 내 속에 있는 신명과 흥이 절로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사물놀이는 우리의 맛과 멋, 그리고 신명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거기에 거듭거듭 새 옷이 입혀져 새롭게 태어나 글로벌화, 인류화하고 있다.

사물놀이는 또한 나라와 겨레의 애환을 함께 해 왔다. KOTRA 가는 곳에 사물놀이가 따라갔으며, 1987년 6월 항쟁 때의 ‘바람맞이’, 2002년 월드컵의 신명, 최근의 촛불에 이르기까지 거기 사물놀이가 있었고 김덕수가 있었다.

10여 년 전 나는 김덕수에게 ‘신명’이라는 아호를 선물했다. 나는 가능하다면 올해 안에 김덕수의 광대 60년을 조명하고 기념하는 판을 열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힘이 모자라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란 이렇게나마 그의 광대 60주년을 축하해 주는 일이다. 사물놀이야말로 원조 한류요, 김덕수야말로 ‘걸어 다니는 국보’라고 말할 수 있다. 세포 하나하나까지 살아 꿈틀거리게 하는 사물놀이의 그 신명이여, 세상 끝까지 하늘 끝까지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