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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원묵 선덕사 주지] 사회적 대타협 바람아 불어라
2017년 07월 28일(금) 00:00
요즘 대다수 절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고 한다.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화장실의 옛 이름에는 뒷간, 정낭, 칙간(측간), 구세, 통시 등 여러 가지가 있고, 일제 강점기 때부터 주로 사용된 변소라는 이름도 있다.

그런데 과거에 절에서 사용한 화장실 이름으로 북수간(北水間)이 있다. 앞산을 남산이라고 하듯이, 방위상으로 북은 뒤를 가리키므로 북수간은 뒷물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동남아시아를 가보면 휴지 없이 물로 씻도록 되어 있는 화장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런 문화에 어울리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 꼬삼비 지역의 일이다. 어느 날 한 강사 스님이 볼 일을 보고 뒷물을 한 뒤 뒷물 바가지 비우는 것을 깜빡 잊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좀 있다 율사 스님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비워지지 않은 바가지를 보고 그 스님에게 물었다. “벗이여, 그대가 물을 비우지 않고 그냥 두었습니까?” “아차, 제가 깜빡 잊었습니다.” “벗이여, 그것은 규칙 위반입니다.” “제 잘못입니다. 참회합니다.” “벗이여, 이것은 규칙 위반이지만 일부러 한 것이 아니고 부주의해서 일어난 것이니 죄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강사 스님은 율사 스님의 말에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율사 스님은 다른 자리에서 강사 스님이 잘못을 하고도 잘못한 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제자들이 강사 스님의 제자들 앞에서 강사 스님을 비난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강사 스님은 ‘그 스님이 전에는 죄가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다른 말을 한다. 거짓말쟁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율사 스님은 강사 스님이 규칙을 어기고도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격정지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율사 스님을 따르는 측과 강사 스님을 따르는 측으로 나뉘어져 갈등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들은 석가모니 붓다는 장로 스님들을 통해 화합을 이루도록 여러 차례 말하였으나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붓다가 직접 가서 화합의 가치를 일깨우고 화해를 권했지만 그들은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스승님은 관여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이 돌아왔다. ‘수행자들이여, 다툼을 그치시오. 다툼이나 불화나 싸움은 대중에게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대들은 스스로 갖추고 있는 관용과 인내의 빛으로 이 세상을 비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지만 대중들은 화해하지 않았다. 붓다는 다투는 대중을 떠나 숲 속에 3개월간 머물렀다.

꼬삼비 지역의 신도들은 스님들의 갈등으로 붓다가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투는 수행자들 때문에 자신들이 붓다를 만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한 신도들은 분열을 일으킨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거부했다. 며칠에 걸쳐 탁발을 할 수 없게 된 수행자들은 그제야 서로의 잘못을 상대방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붓다에게 용서를 받기 전에는 예전처럼 존경과 공양을 올리지 않겠다고 했다. 먼 길을 찾아와 참회하는 수행자들에게 붓다는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으며, 상대를 인정하고 관용하며 절제함을 통해 극복된다고 가르쳤다.

따져보면 이쪽도 저쪽도 그렇게 주장할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주장만 옳다고 여기고 상대를 무시하거나 이기려 들면 결국 모두가 패배자가 된다.

모두가 귀한 존재로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더 큰 가치로 삼아 상대방의 주장을 존중하고 관용의 자세로 대할 때 비록 내 마음에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절충점이 만들어진다.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자본가와 노동자, 노인과 청년, 영남과 호남, 도시와 시골은 서로 존중해야 할 이유이지 대립해야 할 까닭이 아니다. 경제 성장이 정체되고 미래가 낙관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시절, 대립해야 할 이유를 확인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마음을 모으고 힘을 더하는 사회적 타협에서 대한민국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무더위가 한창이다. 온도는 똑같다지만 더위는 약자에게 더 뜨겁다. 약자의 무더위를 식혀줄 사회적 대타협의 부채질 혹은 미래세대 해우소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