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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현의 문화카페] 올 가을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자
2016년 10월 26일(수) 00:00
지난 여름 서점가에 화제를 모은 책 가운데 ‘빛의 집’(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이란 소설이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판타지 모험담이다. 25살의 주인공 제레미 렉스는 연속극 촬영도중 변성기가 찾아와 배우의 길을 접게 된다. 어느 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은 그는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관람하던 중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묘령의 여인이 주황빛 창문을 열고 손짓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이다. 실제로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접한 순간 주인공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름하여 ‘스탕달 신드롬’이다.

예술작품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겪는 신비한 체험을 뜻하는 스탕달 신드롬의 유래는 이렇다. 16세기 이탈리아의 귀족가문 프란체스코 첸치에게는 베아트리체란 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모를 지녔던 베아트리체는 점점 자라면서 수많은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방탕 귀족의 전형이었던 베아트리체의 아버지는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집안에 가뒀다. 그리고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처녀로 자란 14살의 베아트리체를 겁탈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날 이후 복수할 날만 기다렸던 그녀는 결국 아버지를 살해한 후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집행이 있던 날, 그녀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이탈리아 각지에서 구경꾼들이 피렌체로 모여들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화가 귀도 레니(1573∼1642)는 그녀가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의 모습을 담은 ‘베아트리체 첸치’를 그렸다. 소설 ‘적과 흑’의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1817년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와 맞닥뜨리게 됐다. 무슨 영문인지 한동안 그림 앞에서 발을 뗄 수 없었던 그는 성당을 나오자 마자 갑자기 심장이 뛰고 다리가 풀리는 이상징후를 경험했다. 약 한달간 알 수 없는 증상에 시달린 그는 일기에 자신이 겪었던 황홀함을 적었고 훗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어디 스탕달뿐인가. 예술성이 뛰어난 미술품을 감상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거나 격렬한 흥분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훌륭한 조각상을 보고 모방충동에 사로잡혀 조각상과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림 앞에서 불안과 평화를 동시에 느낀다. 심지어 문학작품이나 유명한 사람의 전기(傳記)를 읽고 난 후에도 이러한 증세를 겪는 사람이 있다.

‘베아트리체 첸치’처럼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에게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아마 붓질마다 스며있는 화가의 열정과 체온, 고뇌와 영혼이 한데 어우러지는 데서 오는 감동일 것이다.

좋은 예술품을 감상한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어른들에게는 무뎌진 감성을 일깨우고, 아이들에게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하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근래 광주에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주제의 전시회들이 풍성하다. 굳이 ‘스탕달 신드롬’까진 아니더라도, 잠시나마 황홀한 체험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나들이하기에 좋은 계절, 가을이지 않은가.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