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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룡 시인·문학들 발행인]보고 싶구나, ‘한 마리 푸른 악어’여
2016년 08월 22일(월) 00:00
머리가 무거울 때는 시집을 펼친다. 책상 모서리에 시집을 쌓아 두고 순간순간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 읽는 것은 딱히 작정한 것도 아닌데 버릇처럼 되었다.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도 왠지 끌려서 불현듯이 만날 수 있는 애인 같은 하루였으면 좋겠다.

어린아이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안다. ‘돈’과 ‘속도’의 세상에서 하루살이 가치관이 아닌가. 의도치 않게 사건이 터지고, 하기 싫어도 하지 않으면 밥을 굶을 것 같아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내일은 나아질 거라고 이를 악물고 꿈을 꾸다가, 그도 힘에 부치면 가당치도 않게 짐을 싸 아예 멀리 떠나 보는 상상에 문득 진저리를 치는.

“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깎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송찬호의 시, ‘분홍 나막신’)

존재론적으로, ‘오직 사랑만을 발명’한 임 앞에서, 우리는 그 분이 사 오신 신발에 내 발을 꼬옥 맞추는 재주를 기를 수밖에 없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살아 있는 한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는 일은 슬프다. 삶은 수습되는 게 아니라 저지르는 일 밖에 다른 것이 없으리라는 예감.

출판은 작가와 독자와 편집자가 만나 이루는 관계의 망(網)이다. 서로 감응하는 관계의 그물이야 어느 분야라고 다를까. 그 망들은 다양한 약속으로 이어지고, 그 약속의 앞뒤에는 이러저러한 원인과 결과가 자리한다. 그 결과가 실망스러울 때 삶은 피로하다. 실망을 만회하려 최선을 다해 볼 수는 있지만 내 잘못이 아닐 때는 상대의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도 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나.

시도 하나의 포즈다. 공간으로 치면 한 단면이요, 시간으로 치면 한 순간이다. 봄에 복사꽃이 핀다. “갑자기 울긋불긋한 복면을 한/ 나무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바람이 한 번 불자/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 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 복숭아밭은 공간의 한 단면이요, 복숭아꽃으로 무장한 무사들이 나를 에워싸는 상황은 시간의 한 순간이다.

“나는 저 앞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 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 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 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송찬호의 시, ‘복사꽃’)

‘곡우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하고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 현실에서, ‘가까스로 시 한 편’을 내어 놓고 물러났다는 화법이 익살스럽고도 그윽하다.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바쳐야 하는 현실에서, 시인은 물질보다는 영혼을 택한 자들이다.

학연·지연·혈연 혹은 물질만능과 계층의 사회에서, 오로지 언어만으로 제 삶과 세계의 궁극을 추구하는 자들이 시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까스로 시 한 편’을 바치고 나서 식솔들을 건사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 현실이다. 약속이 틀어져도 원인과 결과를 알아낼 방도가 없다. 상품을 과대포장 하는 광고 같은 말들이 눈과 귀를 지배하는 세상이다.

‘416 단원고 약전-짧은 그리고 영원한’, ‘세월호, 그날의 기억’, ‘금요일엔 돌아오렴’ 등 세월호 관련 책들은 차마 읽을 수 없다. 사건 당시 군 복무 중이었던 큰아이는 올 봄에 대학에 복학했다. 내가 권한 세월호 관련 책 한 권을 한 달이 넘도록 품에 지니고만 다녔다. 반응이 궁금해 물어보면 입술만 달싹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슬쩍 본 그 녀석의 메모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월호 사건을 우리가 평가하거나 비평하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짓이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문학적 표현은 단말마의 신음일 수밖에 없다. 1980년 5·18이나 1960년 4·19 직후에도 문학작품은 단말마의 비명 혹은 외침이었다. 그 단말마들을 구태여 ‘프로파간다’라고 폄하할 것까지는 없겠다. 예술성이든 정치성이든, 단말마의 말들은 제 옷을 빼앗겼거나 과감히 벗어던진 맨몸뚱이들의 말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유폐하고 단식에 돌입한다. 광장으로 몰려 나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삭발을 하거나 오체투지로 기어서라도 길을 가는 것은 맨몸뚱이를 드러내고 그 몸뚱이로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제발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좀 기울여 달라는 호소다.

송찬호 시인은 절망한다.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노래한다.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만년필’)

김수영 시인도 절망했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노래했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절망’)

의문만 무성하고 대답 없는 날들이다. 책상 위에는 시집들이 쌓여 간다. 그러니 더욱 보고 싶구나, “한 마리 푸른 악어”여.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