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룡 시인·문학들 발행인]보고 싶구나, ‘한 마리 푸른 악어’여
머리가 무거울 때는 시집을 펼친다. 책상 모서리에 시집을 쌓아 두고 순간순간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 읽는 것은 딱히 작정한 것도 아닌데 버릇처럼 되었다.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도 왠지 끌려서 불현듯이 만날 수 있는 애인 같은 하루였으면 좋겠다.
어린아이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안다. ‘돈’과 ‘속도’의 세상에서 하루살이 가치관이 아닌가. 의도치 않게 사건이 터지고, 하기 싫어도 하지 않으면 밥을 굶을 것 같아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내일은 나아질 거라고 이를 악물고 꿈을 꾸다가, 그도 힘에 부치면 가당치도 않게 짐을 싸 아예 멀리 떠나 보는 상상에 문득 진저리를 치는.
“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깎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송찬호의 시, ‘분홍 나막신’)
존재론적으로, ‘오직 사랑만을 발명’한 임 앞에서, 우리는 그 분이 사 오신 신발에 내 발을 꼬옥 맞추는 재주를 기를 수밖에 없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살아 있는 한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는 일은 슬프다. 삶은 수습되는 게 아니라 저지르는 일 밖에 다른 것이 없으리라는 예감.
출판은 작가와 독자와 편집자가 만나 이루는 관계의 망(網)이다. 서로 감응하는 관계의 그물이야 어느 분야라고 다를까. 그 망들은 다양한 약속으로 이어지고, 그 약속의 앞뒤에는 이러저러한 원인과 결과가 자리한다. 그 결과가 실망스러울 때 삶은 피로하다. 실망을 만회하려 최선을 다해 볼 수는 있지만 내 잘못이 아닐 때는 상대의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도 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나.
시도 하나의 포즈다. 공간으로 치면 한 단면이요, 시간으로 치면 한 순간이다. 봄에 복사꽃이 핀다. “갑자기 울긋불긋한 복면을 한/ 나무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바람이 한 번 불자/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 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 복숭아밭은 공간의 한 단면이요, 복숭아꽃으로 무장한 무사들이 나를 에워싸는 상황은 시간의 한 순간이다.
“나는 저 앞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 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 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 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송찬호의 시, ‘복사꽃’)
‘곡우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하고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 현실에서, ‘가까스로 시 한 편’을 내어 놓고 물러났다는 화법이 익살스럽고도 그윽하다.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바쳐야 하는 현실에서, 시인은 물질보다는 영혼을 택한 자들이다.
학연·지연·혈연 혹은 물질만능과 계층의 사회에서, 오로지 언어만으로 제 삶과 세계의 궁극을 추구하는 자들이 시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까스로 시 한 편’을 바치고 나서 식솔들을 건사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 현실이다. 약속이 틀어져도 원인과 결과를 알아낼 방도가 없다. 상품을 과대포장 하는 광고 같은 말들이 눈과 귀를 지배하는 세상이다.
‘416 단원고 약전-짧은 그리고 영원한’, ‘세월호, 그날의 기억’, ‘금요일엔 돌아오렴’ 등 세월호 관련 책들은 차마 읽을 수 없다. 사건 당시 군 복무 중이었던 큰아이는 올 봄에 대학에 복학했다. 내가 권한 세월호 관련 책 한 권을 한 달이 넘도록 품에 지니고만 다녔다. 반응이 궁금해 물어보면 입술만 달싹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슬쩍 본 그 녀석의 메모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월호 사건을 우리가 평가하거나 비평하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짓이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문학적 표현은 단말마의 신음일 수밖에 없다. 1980년 5·18이나 1960년 4·19 직후에도 문학작품은 단말마의 비명 혹은 외침이었다. 그 단말마들을 구태여 ‘프로파간다’라고 폄하할 것까지는 없겠다. 예술성이든 정치성이든, 단말마의 말들은 제 옷을 빼앗겼거나 과감히 벗어던진 맨몸뚱이들의 말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유폐하고 단식에 돌입한다. 광장으로 몰려 나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삭발을 하거나 오체투지로 기어서라도 길을 가는 것은 맨몸뚱이를 드러내고 그 몸뚱이로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제발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좀 기울여 달라는 호소다.
송찬호 시인은 절망한다.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노래한다.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만년필’)
김수영 시인도 절망했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노래했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절망’)
의문만 무성하고 대답 없는 날들이다. 책상 위에는 시집들이 쌓여 간다. 그러니 더욱 보고 싶구나, “한 마리 푸른 악어”여.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안다. ‘돈’과 ‘속도’의 세상에서 하루살이 가치관이 아닌가. 의도치 않게 사건이 터지고, 하기 싫어도 하지 않으면 밥을 굶을 것 같아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내일은 나아질 거라고 이를 악물고 꿈을 꾸다가, 그도 힘에 부치면 가당치도 않게 짐을 싸 아예 멀리 떠나 보는 상상에 문득 진저리를 치는.
출판은 작가와 독자와 편집자가 만나 이루는 관계의 망(網)이다. 서로 감응하는 관계의 그물이야 어느 분야라고 다를까. 그 망들은 다양한 약속으로 이어지고, 그 약속의 앞뒤에는 이러저러한 원인과 결과가 자리한다. 그 결과가 실망스러울 때 삶은 피로하다. 실망을 만회하려 최선을 다해 볼 수는 있지만 내 잘못이 아닐 때는 상대의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도 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나.
시도 하나의 포즈다. 공간으로 치면 한 단면이요, 시간으로 치면 한 순간이다. 봄에 복사꽃이 핀다. “갑자기 울긋불긋한 복면을 한/ 나무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바람이 한 번 불자/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 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 복숭아밭은 공간의 한 단면이요, 복숭아꽃으로 무장한 무사들이 나를 에워싸는 상황은 시간의 한 순간이다.
“나는 저 앞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 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 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 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송찬호의 시, ‘복사꽃’)
‘곡우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하고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 현실에서, ‘가까스로 시 한 편’을 내어 놓고 물러났다는 화법이 익살스럽고도 그윽하다.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바쳐야 하는 현실에서, 시인은 물질보다는 영혼을 택한 자들이다.
학연·지연·혈연 혹은 물질만능과 계층의 사회에서, 오로지 언어만으로 제 삶과 세계의 궁극을 추구하는 자들이 시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까스로 시 한 편’을 바치고 나서 식솔들을 건사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 현실이다. 약속이 틀어져도 원인과 결과를 알아낼 방도가 없다. 상품을 과대포장 하는 광고 같은 말들이 눈과 귀를 지배하는 세상이다.
‘416 단원고 약전-짧은 그리고 영원한’, ‘세월호, 그날의 기억’, ‘금요일엔 돌아오렴’ 등 세월호 관련 책들은 차마 읽을 수 없다. 사건 당시 군 복무 중이었던 큰아이는 올 봄에 대학에 복학했다. 내가 권한 세월호 관련 책 한 권을 한 달이 넘도록 품에 지니고만 다녔다. 반응이 궁금해 물어보면 입술만 달싹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슬쩍 본 그 녀석의 메모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월호 사건을 우리가 평가하거나 비평하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짓이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문학적 표현은 단말마의 신음일 수밖에 없다. 1980년 5·18이나 1960년 4·19 직후에도 문학작품은 단말마의 비명 혹은 외침이었다. 그 단말마들을 구태여 ‘프로파간다’라고 폄하할 것까지는 없겠다. 예술성이든 정치성이든, 단말마의 말들은 제 옷을 빼앗겼거나 과감히 벗어던진 맨몸뚱이들의 말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유폐하고 단식에 돌입한다. 광장으로 몰려 나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삭발을 하거나 오체투지로 기어서라도 길을 가는 것은 맨몸뚱이를 드러내고 그 몸뚱이로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제발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좀 기울여 달라는 호소다.
송찬호 시인은 절망한다.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노래한다.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만년필’)
김수영 시인도 절망했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노래했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절망’)
의문만 무성하고 대답 없는 날들이다. 책상 위에는 시집들이 쌓여 간다. 그러니 더욱 보고 싶구나, “한 마리 푸른 악어”여.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