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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옥숙 인문지행 대표]왜 우리는 수상(受賞)에 집착하는가?
2016년 07월 11일(월) 00:00
최근 들어서 1분에 10권이 팔리는 책이 있다. 이 믿기 어려운 사건은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 이야기다. 지난 5월 17일, 한강 작가가 영국의 맨부커상의 수상자라는 소식을 모든 언론이 생중계하듯이 전해 준 이후 서점가에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순수창작 소설이 이렇게 많이 팔린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고 그 만큼 좋은 일이지만, 마냥 손뼉 치며 좋아하기가 찜찜하다. 독서량은 세계 최하위에 드는 나라의 온 국민이 문학을 이토록 사랑한다는 것도 생경한 일이고, 출판된 지 10년 된 소설을 이제 와서 조금이라도 빨리 사려고 야단인 것도 씁쓸한 일이다.

맨부커상을 못 받았더라면 이 소설은 어찌 될 뻔했는가! 수상 이후 단 하루 만에 팔린 판매량이 그 10여 년 사이에 팔린 것보다 훨씬 더 많다니, 상의 위력이 정말 놀랍다. 그런데 이런 열광적 반응을 보면서, 그 안에 숨겨진 우리의 자화상을 읽게 된다.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수상하기 전에는 이런 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채식주의자’라는 소설 또한 수상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별 관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수상에 열광하는 현상은 상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 타인의 평가에 목숨 걸며, 외부의 인정에 집착하는 우리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투영은 아닐까?

어찌 보면 맨부커상이 ‘채식주의자’를 발굴해서 우리에게 돌려준 셈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차분하게 돌아봐야 할 문제들이 보인다. ‘채식주의자’에 대한 지금의 뜨거운 반응이 사실 작품에 대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작품의 문학성에 대한 찬사이거나, 작가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고민과 공감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더 어렵다.

사실 맨부커상의 수상에 대한 열광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좋은 작품이 된 것은 아닌가라고 묻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는 이제 더 이상 한국문학이 아니며 영어로 ‘표절’된 작품일 뿐이라는 주장은 조금은 지나치고 거칠지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큰 화두를 던진다.

아무리 위대한 상이라고 하더라도 한순간에 온 국민의 문학적 욕구와 감각을 갑작스럽게 깨울 수는 없다. 상을 받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문학강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맨부커상의 수상을 바라보는 가장 안타까운 시선은 이 상을 ‘징검다리 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제 한 달 정도가 겨우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맨부커상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노벨상으로 끝난다.

여기에는 두 상을 더 큰 상과 작은 상으로 나누는 서열 의식이 분명하다. 그리고 맨부커상은 노벨상을 위한 시작이라는 생각이다. ‘내친 김에 노벨 문학상까지’ 가자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채식주의자’에 대한 떠들썩한 ‘소비’는 있지만 작품의 의미에 대한 진지하고 차분한 이야기가 없는 이유다.

물론 노벨상에 대한 기대는 좋다. 다만 그 방법과 태도가 문제다. 미국의 한 시사지가 “정부의 강한 지원으로 한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칼럼을 실었다. 이 글은 문학에는 별 관심도 없으면서 노벨상만을 바라는 우리의 딱한 모습을 꼬집는 비판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출신의 노벨상 수상작가 클레지오에게도 어김없이 노벨상을 타는 비결을 물었다. 대답은 ‘노벨상에 관한 조언은 없다.’였다.

언제쯤 우리는 욕망만 있고, 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추한 집착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 노벨상이 제 아무리 대단한 상이라고 한들 자국민이 감동받고 음미하며 사랑하지 않는 작품이라면 의미가 없다. 문학은 상을 통해서가 아니고, 감응되고 공감하는 독자와의 소통을 통해서 존재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상이란 다만 이러한 작업에 대한 확인과 보상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수상 작가 한 사람에게 과도한 짐을 지운다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건 이후 문학계는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구원투수’가 절실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한 작가의 수상에만 의지해서 침체의 극복을 기대하는 것은 안일하다 못해서 천진난만하다. 문학은 호기심으로 몰려오는 대중이 아니고 읽을 줄 알며, 읽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가 필요하다. 상이 비추는 한 때의 불빛을 보고 모여든 독자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왜 우리는 아직도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고 구원해 줄 ‘영웅’만을 열광하고 기다리는가? 문학을 사랑하는 것은 ‘문학적 영웅’을 만들어 내서 지치도록 소모하는 것이 아니다.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또 독한 가난 속에서도 글 쓰는 삶을 사는 수많은 작가들을 읽고 만나는 것이다.

맨부커상 수상 소식과 함께, 한 시인이 생활고 때문에 정부의 보조금을 신청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노벨상으로 가는 최선의 길은 부질없는 욕망과 집착,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정책보다 시인은 시를 쓰고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수상에 대한 집착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제 한국문학이 밖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서 정말 ‘한국문학’이 되어야 할 시간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