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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옥숙 인문지행 대표]왜 우리는 서로를 벌레로 부르는가?
2016년 06월 13일(월) 00:00
사람이 사람을 ‘벌레’라고 부르는 세상이다. 생각이 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싫다는 이유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집단을 ‘벌레’라고 부른다. 자식을 버릇없이 키운다고 해서 ‘맘충’에, 한국 남자들은 흉악범이라는 뜻의 ‘한남충’, 노인들은 ‘틀니충’이고 심지어 특정 지역의 사람들은 ‘홍어충’이라고 한다.

그저 별 생각 없이 재미로 하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세상이 벌레로 가득한 느낌이다. 설령 이러한 현상이 한때 유행하고 지나갈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의 특정한 상황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한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사용되는 언어 표현은 그 집단의 의식과 정서적 상황을 투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벌레’로 부르는 이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서로를 ‘벌레’라고 마구잡이로 비하하는 모습에서 카프카의 ‘변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항상 같은 기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에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이 벌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제대로 놀라기도 전에 직장 상사의 질책을 떠올리고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 해고의 두려움과 길바닥에 나앉게 될지도 모르는 가족이 먼저인 것이다. 그러면서 벌레가 된 것은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며 죄의식마저 갖는다.

벌레가 된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가? 단 하루도 결근한 적이 없이 회사의 명령에 충실했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시계의 알람을 4시에 정확하게 맞추고 잠을 자는 일이다. 유일한 자랑거리는 아직까지 병가를 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소원은 있다. 한 번쯤 다른 사람들처럼 잠을 충분히 자고 여유 있게 아침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원도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으로 끝난다.

“사장한테 한번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해 볼 만도 한데. 그러면 당장에 쫓겨날 거야. 하지만 쫓겨나는 게 내게 좋을지도 몰라.” 해고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해고를 바라는 감정 사이에서 한 사람의 위태로운 삶과 삶을 지배하는 것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살기 위해서 누구나 먹고 입어야 하고, 쉬고 잠을 자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노동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노동하는 목적과 이유는 아니다. 사람은 노동함으로써 동물적 생존을 넘어서 자기실현과 성취를 이루며 더 나은 단계로 도약하고자 한다. 이런 뜻에서 노동은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한 과정이고 방법이며, 또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오히려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니, 퇴근 후에 하는 일이라고는 다음날 아침 일어날 시간을 맞춰 놓고, 잠을 자는 것이 전부인 사람에게 무슨 자기실현과 인간성의 고양인가! 여기에다 ‘노오력’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낯 뜨겁고 민망한 일이다.

그럼, 노동의 예속을 벗어나면 자유로울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노동은 사람을 결정하고 보증하기 때문이다. 실직과 무직은 일자리를 잃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 밖으로의 추방을 의미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건강한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세상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세상에서는 누구나 쉽게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며 ‘쓸모’의 등급이 나눠진다.

벌레라는 표현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낙인이 아닌가! 쓸모없는 존재를 혐오하는 것은 가족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노동에 예속되어서, 사는 데 급급한 세상에서 가족 또한 이기적이고 기능적인 관계일 뿐이다.

그래서 가족은 벌레를 처리하기로 결정한다. 한때 성실한 가장이었고, 흠잡을 데 없는 아들이었고, 좋은 오빠였던 사실도, 벌레가 된 후에도 여전히 가족을 걱정하고 어떻게든 재기하려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인공은 벌레가 된 후에야 사람으로서는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음악을 비로소 듣는다. 이제야 시간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의 소망이 벌레가 되고 난 후에야 이루어지는 것, 얼마나 지독한 역설인가?

누구나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지만, 일할수록 소외와 배제의 덫에 갇히는 것이 현실이다. 세상이 모두가 상품이 되고 소모품이 되는 거대한 시장의 구조로 움직일 때, 쓸모에 따라서 교환되는 소외된 삶, 즉 벌레의 삶은 피할 수 없다.

19살밖에 되지 않은 어느 청년 노동자가 일을 하는 도중 사망하였고, 가방에는 미처 먹지 못한 컵라면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청년에게 노동은 무엇인가? 살기 위한 노동은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도구였고 원인이었다. 노동을 통해서 자기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지만,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위한 구조와 조건을 만드는 것은 사회의 몫이다. 자신의 노동이 자신을 파괴하는 세상에서 희망과 삶의 긍정을 말하는 것은 얼마나 뻔뻔한 일인가!

총체적으로 왜곡된 구조 안에서는 벌레의 삶만이 강요되고 계속될 것이다. ‘변신’의 주인공은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타인을 벌레라고 말하는 혐오감에는 소외감과 분노와 절망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소설 이야기가 현실로 계속되는 한, 그럼에도 변화를 서둘지 않는 한, 서로가 서로에게 벌레로 보이며, 그러므로 벌레라고 부르는 일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