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반기문 바람’과 정치권의 과제
임 동 욱
서울취재본부 부본부장
2016년 06월 01일(수) 00:00
대선 시계의 초침이 빨라지고 있다. ‘반풍’(潘風: 반기문 바람) 때문이다. 20대 국회가 개원한 지난 30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6일 동안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출국했다.

그의 방한은 단숨에 여야의 기존 대선 구도를 뒤흔들며 큰 잔상을 남겼다. 출국에 앞서 ‘확대 해석을 자제해 달라’며 정치적 수위 조절을 했지만 그는 유력한 차기 잠룡이 되어 떠났다.

반 총장의 국내 일정은 정치적 행보와는 무관하다는 설명과는 달리 사실상의 대선 선포식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 총장은 지난 25일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누군가 대통합을 선언하고 국가 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면서 통합의 리더십을 제기, 대선 도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26일 제주포럼 기조연설을 통해서는 북한과의 대화와 평화를 강조하며 대북 문제를 정치적 보폭을 넓힐 교두보로 삼는 모습도 보였다. 정점은 지난 주말이었다. 공식 일정 없이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것이라던 28일에는 충청 정치의 대부 격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자택을 찾아 ‘충청권 대망론’에 불을 지폈다. 저녁에는 노신영 전 총리 등 정·관계 원로들을 만나 만찬을 함께했다.

29일에는 문화유산 탐방을 명분으로 서애 유성룡 선생의 고택이 있는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을 찾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나무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주목(朱木)을 기념 식수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는 그가 개인 일정으로 TK지역(대구·경북)을 방문했다는 점에서 ‘충청+TK’ 연대의 대선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이번 방한을 통해 그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던 ‘기름 장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여권의 ‘잠룡’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앙일보가 지난 27∼28일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신뢰 수준 95%에 표본오차 ±3.1%p)에서 응답자의 28.4%가 ‘차기 대통령으로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반 총장을 꼽았다. 2위와 3위를 차지한 야권의 대선 주자들과는 10% 포인트 이상 차이가 났다.

하지만 반풍(潘風)이 내년 대선까지 위력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고건·정운찬·문국현·안철수 등 정치권이 아닌 제3지대에서 유력 대선 주자로 거론됐던 인사들의 성공 케이스를 아직까지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궤적도 그가 내세운 대통합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대통합의 원천은 신뢰이기 때문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외면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를 외교통상부 장관에 발탁하고 유엔 사무총장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지난 2011년 단 한 차례 묘소를 찾는 데 그쳤다. 봉하마을에서 부탁한 추모 영상 메시지도 거절했다. 이번 방한 기간, 연고가 없는 경북 안동과 경주 등을 찾으면서도 노 전 대통령이 묻힌 경남 김해는 찾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무신불립(無信不立)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TK를 찾아 충청·영남의 지역 연대 가능성을 열어 둔 것과 여권 성향의 정·관계 인사들을 중점적으로 만난 것도 대통합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 통합의 비전 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기존 질서와의 영합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관료로서의 한계도 거론되고 있다. 그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성공한 외교 관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시대의 아픔을 민심과 함께 온몸으로 밀고 나가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십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일부 지적도 있다.

하지만 반풍(潘風)의 등장은 정치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동력이 정치권에 대한 민심의 불신에서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정치적 때가 덜 묻은 외교 관료 출신의 반 총장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다.

20대 국회가 경제와 안보 위기 등 국내외의 엄중한 도전 속에서 개원했다. 16년 만의 여소야대 구도에 20년 만의 3당 체제는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정쟁과 대립이 아닌 대화와 협치를 통해 민생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보여야 한다.

반풍의 8할은 ‘못난 정치’에 기인한다. 정치권이 반풍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의미를 새기고 변화와 혁신의 길을 제시할 것인지 정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반풍의 종속변수로 끌려다닐지는 오로지 그들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