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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홍 행 기
정치부장
2016년 05월 18일(수) 00:00
5·18이다. 호남인의 피와 눈물과 한숨을 거름 삼아 한국의 민주주의를 꽃피워 낸 5·18 그날이 36년 전 바로 오늘이다. 눈 감으면 이웃집 아주머니가 “천천히 먹으라”며 내밀던 주먹밥, 대학생 형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간 뒤 소식이 끊긴 옆집 친구, 총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던 살벌한 표정의 계엄군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가는 그날이다.

광주·전남 출신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 생)라면 거의 모두가 경험했겠지만,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 5월의 대학 교정은 낭만이 아니라 메케한 최루탄 냄새와 전투경찰로 가득 찬 곳이었다. 격렬한 데모가 하루걸러 이어지고, 그때마다 교정엔 전경들이 발사한 최루탄이 회색 연기를 내뿜고 지랄탄이 땅바닥을 여기저기 갈고 날아다녔다. 처음엔 너무도 매워 눈도 못 뜬 채 눈물·콧물 흘렸지만 그것도 어느덧 익숙해져 최루탄 연기 가득한 교정을 모두가 핏발 선 맨눈으로 뛰어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데모가 뜸해질 때면 이웃 여대에서 “남자라는 말이나 하지 말든지”라며 우리 대학 총학생회에 면도칼을 소포로 보내오기도 했다.

대학 시절 데모를 하다 전경이 쏜 최루탄에 눈을 맞아 수술을 받은 과 동기 용석이도 생각난다. 그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녔지만 광주가 고향인, 요즘 ‘일베’들이 싫어하는 ‘호남 출신’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광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순진하지만 의협심 강한’ 그가 대학에 들어와 ‘민주 투사’가 된 것은 ‘5·18 광주’를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평소에도 타 지역 출신 선·후배들에게 5·18 이야기를 많이 하곤 했기에 당연히 그랬을 만하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수술을 받은 지 몇 달 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강의실에 나타난 그의 얼굴을 우리는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환하게 웃었지만 우리 동기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모두가 마음속으로 울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용석이는 최루탄을 맞아야 했을까. 왜 그는 실명을 해야 했을까. 그의 희생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마무리된 것이 한 달여 전이다. 야권의 심장부 광주에서 태동한 ‘녹색 바람’에 힘입어 야권은 16년 만에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만들어 냈다. 호남권에선 신생 정당인 ‘국민의당’이 압승하고, 전국적으로는 ‘더불어민주당’이 제1당으로 올라선 선거 결과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것이었다.

국민은 국가를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한 여권을 향해 혹독하게 책임을 물었고, 야권엔 정권 교체의 기회를 다시 한 번 부여했다. 호남은 새로운 정치 실험으로 불릴 만한 이번 총선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빛바랜 호남정신의 부활, 쇠락해 가는 호남정치의 복원 가능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80년 광주의 5·18’이 군홧발에 짓밟힌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해 냈듯이, 그 5·18에서 비롯된 ‘민주·평화·인권’의 호남정신이 ‘분열과 갈등’으로 무너져 가는 한국 정치를 되살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하지만, 지금 호남정신은 또다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난 80년대 데모를 막아선 전경들의 방패 앞에서, 그리고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뜨겁게 울려 퍼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3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도 제창이 거부된 것이다. 이는 5·18의 모태이자 민주 성지인 호남, 그리고 호남정신을 거부하는 것임은 물론 소통과 협치·통합을 촉구한 4·13총선의 민심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6년이 지난 지금, 광주는 또다시 ‘호남, 그리고 5·18 정신이 왜곡되고 거부되는’ 메마른 광야에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호남은 더 이상의 차별, 더 이상의 소외를 거부한다. 정부는 4.13총선 결과에 나타난 의미를 잊어선 안 된다.

광주는 5월의 민주 영령들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싶다. 타는 목마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