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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예의
박 진 현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
2016년 03월 02일(수) 00:00
미술관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아이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웃음소리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미술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한, 미술관이었다. 그 흔한 그림 한 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수영장을 연상케 하는 50m 길이의 레인이 건물 중앙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물이 찰랑거리는 레인 양 옆에는 각양각색의 조각상들이 전시돼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물이 흐르는 공간에서 예술품 감상이라니…. 상상조차 못했던 진풍경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2년 전에 들렀던 프랑스 루베 ‘수영장 미술관’의 풍경이다. 국내외 미술관들을 둘러볼 기회가 많았지만 ‘수영장 미술관’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개념이었다. 이곳은 수영장을 리모델링한 미술관이었던 것이다.

지난 1932년 가난한 공장 노동자들의 후생시설로 건립된 수영장은 이후 수십여 년 동안 도시의 명물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경기 침체로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용객이 줄어들었고 물탱크 부식으로 안전 문제까지 겹치면서 1985년 영구 폐쇄됐다.

냉기가 가득한 수영장에 따스한 햇볕이 비치게 된 것은 지난 1990년대 초반. 당초 루베시 당국이 수영장 철거로 가닥을 잡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자 시민들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유는 단 하나. 오랜 세월 시민들과 동고동락해 온 수영장을 없애는 건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과 기억을 지우는 것이라며 보존을 요구했다.

지역민들은 박제된 공간이 아닌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리모델링하기 위해 루베시의 역사와 수영장의 보존 가치 등을 주제로 다양한 아카이브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 결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문화수도 릴과 파리의 문화기획자들이 루베 수영장에 주목하면서 미술관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10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지난 2001년 개관한 수영장 미술관은 과거와 현재에 머물지 않고 세대를 아우르는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미술관의 스피커를 통해 1시간 간격으로 ‘그 시절’ 아이들의 물놀이 소리를 틀어 주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보스턴의 도심을 관통하는 빨간색 라인(red line)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도 마찬가지다. 1951년 보스턴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현장’들을 지역 브랜드로 키우자는 시민들의 제안으로 탄생한 프리덤 트레일에는 미국 독립혁명과 관련된 16개의 유적지뿐만 아니라 보스터니언(Bostonian)들의 숨결이 스며 있는 퀸시마켓과 마을회관이었던 ‘퍼네일 홀’까지 아우른다. 특히 18세기 농산물과 식료품을 판매했던 퀸시마켓의 ‘변신’은 가히 놀랄 만하다. 대규모 쇼핑몰이 밀려들면서 도시개발 업자들에 의해 철거될 위기를 맞았지만 ‘시간의 흔적’을 지키자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기사회생했다.

여느 대도시의 쇼핑단지와 다른 점은 지역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의 아트숍이 수백여 개 들어서 있고 다양한 로컬푸드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연중 퀸시마켓과 퍼네일 홀 앞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공연과 마술쇼, 버스킹(길거리 공연) 등의 ‘퍼네일 홀 & 퀸시마켓 플레이스 페스티벌’은 매년 전 세계에서 1900만 명이 다녀가는 글로벌 축제로 자리 잡았다.

바야흐로 3월이다. 봄의 길목에 들어선 광주는 요즘 역동적인 문화 융성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다.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개관에 맞춰 문화전당과 전당 인근 명소들을 활성화시키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는가 하면 5·18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27곳을 잇는 ‘오월길’ 조성 사업에 들어갔다. 전당 주변 활성화 중에는 근대유산의 보고(寶庫)인 양림동 역사문화마을과 문화전당 및 남광주야시장을 하나의 벨트로 묶는 사업이 눈에 띈다. 예술의 거리와 금남로 주변을 문화광장으로 꾸미는 ‘문화전당 프린지 페스티벌’도 있다. ‘걷고 싶은 오월길’ 조성 사업은 총 22억 7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5·18 민중항쟁의 역사가 서려 있는 사적지들을 5개 코스로 나눠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 같은 장밋빛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으려면 ‘기억의 공유’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양림동의 가치와 오월길의 의미 등을 알리는 ‘과거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오랜 세월 광주의 삶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내 함께 나누는 스토리텔링이 동반될 때 문화 광주의 ‘봄날’도 좀 더 빨리 오지 않을까.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