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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투더 1988
2015년 12월 02일(수) 00:00
대입 6수생인 정봉이는 공부만 빼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24살 청년이다. 오래전부터 틈틈이 모으고 있는 우표들과 LP판들은 그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다. 그것도 부족해 얼마 전부터는 입시생들의 필독서인 ‘성문영어’ 보다 전화번호부를 들여다 보는 별난 취미까지 생겼다. 게다가 늦은 밤에는 책상 앞에 앉아 MBC 라디오 FM의 인기 프로인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보낼 예쁜 엽서를 만든다. 운 좋게도 자신이 보낸 엽서가 방송을 타는 날이면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환호성을 지른다. 최근 방송가에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tvN 주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정봉이의 이야기다.

지난달 중순 방영된 ‘첫눈이 온다구요’편에 소개된 이 에피소드를 본 순간 불현듯 30여 년 전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정봉이처럼 창의적인 글과 그림이 담긴 엽서를 방송국에 보낸 적은 없지만 당시 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MBC라디오 예쁜 엽서전’에 출품된 기발한 ’작품’들을 보고 단짝친구와 함께 감탄했던 일이 생각났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으로 시작되는 드라마 OST ‘청춘’은 또 어찌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지. 잊고 있었던 애틋한 추억들을 하나씩 ‘강제소환’하는 ‘응답하라…’덕분에 요즘 주말을 기다리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런데 최근 기자만 ‘추억팔이’에 빠진 게 아닌가 보다. 지난 28일 방송된 ‘응답하라 1988’(8화)가 평균 시청률 12.2%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성적인 ‘응답하라 1994’(지난해 방영)의 11.9%를 뛰어넘었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친근한 캐릭터들 때문이다. 독서실만 가면 프라임 영어사전을 벤 채 잠자는 덕선이는 아랫집에 살던 아이였고 공부는 잘하지만 ‘이기적인’ 언니인 보라도 옆 동네에 사는 누나나 여동생이었다.

힐링과 감성을 ‘저격한’ 드라마 속의 음악들도 빼놓을 수 없는 흥행요인이다. 음원 사이트 멜론에는 밴드 혁오가 부른 이문세의 ‘소녀’가 1위, 이적이 부른 전인권의 ‘걱정 말아요 그대’가 4위, 김필이 부른 산울림의 ‘청춘’ 등이 톱 10에 올랐다. 19살인 둘째 아들 녀석이 요즘 즐겨 듣는 노래들도 이들 OST다.

‘응답하라…’ 가 통할 수 있는 건 그 시절 풍성한 문화 콘텐츠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난 고(故)신해철과 이선희, 노래를 찾는 사람들, 김완선,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등 80∼90년대는 발라드, 댄스, 민중가요, 힙합, 레게, 록 등 다양한 음악이 등장한 문화융성의 시대였다. 이 시기의 노래들을 소재로 한 ‘무한도전 토토가’, ‘슈가송’ 등 예능프로가 화제를 모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 하게도 지금은 ’과거’로 돌아가야 살아남을 만큼 세대를 아우르는 콘텐츠가 빈약하다. 아무리 유행이 돌고 돈다지만 문화발전을 위해선 미래지향적인 콘텐츠도 필요하다. 문득 먼 훗날 ‘응답하라 2015’를 찍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궁금하다.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