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되짚어 본 광주·전남 아·태전쟁 유적] 그림같던 섬에 군사 시설 … 조선인 설움 배인 1004섬
[<11> 전쟁 요새가 된 비금도·자은도]
목포, 전남 물자·인력 일본 가는 통로
일본, 주변 섬에 경비 초소·포대 설치
신안·여수·진도 등 섬에 병력 배치
항공기 경계·미군기 감시 엄호기지로
자은도 동굴들 산 7부 능선에 구축
섬 주민 등 강제 동원돼 가혹한 노동
목포, 전남 물자·인력 일본 가는 통로
일본, 주변 섬에 경비 초소·포대 설치
신안·여수·진도 등 섬에 병력 배치
항공기 경계·미군기 감시 엄호기지로
자은도 동굴들 산 7부 능선에 구축
섬 주민 등 강제 동원돼 가혹한 노동
![]() 비금도 전파경계기 진지. 정상부 경사면을 절개해 돌담을 쌓고 V자 형태로 출입구를 축조했다. |
‘섬들의 고향’ 신안 곳곳의 섬들은 1940년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군사 시설이 들어서면서 ‘전쟁 도구’로 악용된 아픔을 갖고 있다.
일본이 전쟁 당시 미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목포 등지에 전쟁 요새를 만들고,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목포를 둘러싼 신안 섬에 임시 포대를 구축하는 등 방어, 감시 시설, 주정기지 등을 건설하면서다.
일본군은 이같은 군사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해 열악한 노동 환경에 끼니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채 대규모 공사를 시켰다.
일본군이 제작한 ‘군산 목포부근연안방어배비요도’ 지도의 목포항을 기점으로 보면 축성계획에 따른 지역별 시설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서남해안의 자은도·비금도, 남해안의 가사도·어불도·추자도·노화도·거문도 등지에 주정 기지 또는 진지가 있었다. 일본군은 목포 앞쪽 섬들에 경비초소나 포대를 설치하고, 미군 함정을 저지하고 목포지구를 방어하기 위해 소형선박의 비밀 정박지인 주정 기지를 설치했다. 특히 주정 기지는 목포와 영산강 하구, 비금도·자금도 사이, 노화도, 추자도, 거문도, 남해도 남서쪽에 각각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목포 인근 지역에 군사시설이 집중적으로 들어선 이유는 목포가 광주·전남 서부지역의 대외진출지로 1897년 개항 이래 전남 지역의 물자와 인력이 일본으로 가는 통로였으며 제주도와 배편으로 연결할 수 있는 최고의 근접 항구였기 때문이었다. 목포는 한반도에서 본토 결전에 대비하는 최전선인 제주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자 자연스럽게 목포를 둘러싸고 있는 신안 섬들에도 일본군과 군사 시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태 전쟁 당시 전남의 섬과 해안 지역 곳곳에는 빈틈없이 대규모 병력이 배치됐다. 신안 비금도, 자은도를 비롯해 여수 거문도, 진도 가사도 등 섬과 해남 반도 등지에 각각 병력 배치가 이뤄졌다.
이 중 신안 비금도는 동중국해 방면의 하늘에서 접근하는 항공기를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반도 서해안을 습격하는 미군기를 감시하는 엄호기지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비금도에 설치한 중요한 군사 시설인 전파경계기(항공기의 내습을 고주파 신호를 이용해 탐지하는 장비)를 설치하고, 이를 엄호하기 위해 비금도에 보병 4개 소대를 배치했다.
이뿐 아니라 일본군은 삼척에 배치돼있던 유수 제20사단 소속의 산포(산악과 같은 험한 지형에서 운용이 쉽도록 제작한 소형·경량 화포) 1개 소대를 목포지구 비금도로 이동시켰다. 미군의 비행기 습격을 감시할 뿐 아니라 남해·서해 일대에서 활동하는 미군 잠수함과 비행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배치였다.
일본군이 가장 많이 사용한 산포는 94식(75㎜)으로 비금도에도 같은 종류의 산포가 배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일본군 포병중대는 4문 편제였기 때문에 비금도에 배치된 산포병 1개 소대는 1문을 갖췄을 가능성이 크다.
전파경계기 부대는 내월리 마을회관 인근의 논에 막사를 짓고 주둔했다가 해방 이후에는 초등학교 개조해 사용했다. 주민들은 당시 일본군이 설치한 우물을 ‘학교샘’이라고 불렀고, 지금도 남아있는 우물터로 주둔지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자은도는 미군 함정이 서해 쪽에서 목포항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수로(水路)를 막아서는 임무를 맡았다.
보병 2개 소대가 배치된 자은도는 비금도보다 더 규모가 큰 진지가 구축된 흔적이 남아있다. 자은도에서 확인된 동굴은 모두 20여개로 ‘U’자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동굴 중간 지점에는 남북으로 관통하는 굴이 있고, 동굴을 보호하고 해안을 지키기 위한 토치카(콘크리트 등으로 만든 엄폐 진지)와 포진지도 구축됐다.
자은도 동굴들은 모두 산의 7부 능선을 타고 뚫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서해안을 따라 목포항으로 진입하는 미군의 움직임을 차단하는데 필요한 시설물과 그에 따른 배치로 보여진다.
이들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가혹한 노동 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대규모 공사인 만큼 진지 구축 공사에는 섬 주민뿐 아니라 외지인까지 동원됐으며, 병사노무동원 외에도 근로보국대 형식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군인이 직접 들어가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물을 사용하는 작업을 하고 나면, 근로보국대 등으로 강제동원된 이들이 돌이나 자갈을 운반하는 단순 육체노동을 했다.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배급조차 내어 주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추위도 막지 못하는 좁은 천막에 20여명이 들어가 이불도 없이 짚이 깔린 바닥에서 누워 중노동의 고통과 허기짐을 달래야 했다.
자은도 주민으로 진지 구축 작업에 동원된 서길순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서 씨는 “하루에 세 끼도 안 주고, 집에서 도시락 싸서 다니라고 한다”, “밤낮 할 거 없이 일만 시켰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감시해 도망도 못 갔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양재희 기자 heestory@kwangju.co.kr
일본이 전쟁 당시 미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목포 등지에 전쟁 요새를 만들고,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목포를 둘러싼 신안 섬에 임시 포대를 구축하는 등 방어, 감시 시설, 주정기지 등을 건설하면서다.
일본군이 제작한 ‘군산 목포부근연안방어배비요도’ 지도의 목포항을 기점으로 보면 축성계획에 따른 지역별 시설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 비금도 동굴 벙커 내부. |
상황이 이렇자 자연스럽게 목포를 둘러싸고 있는 신안 섬들에도 일본군과 군사 시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 목포·여수 일대 일본군 방어시설도. |
이 중 신안 비금도는 동중국해 방면의 하늘에서 접근하는 항공기를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반도 서해안을 습격하는 미군기를 감시하는 엄호기지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비금도에 설치한 중요한 군사 시설인 전파경계기(항공기의 내습을 고주파 신호를 이용해 탐지하는 장비)를 설치하고, 이를 엄호하기 위해 비금도에 보병 4개 소대를 배치했다.
이뿐 아니라 일본군은 삼척에 배치돼있던 유수 제20사단 소속의 산포(산악과 같은 험한 지형에서 운용이 쉽도록 제작한 소형·경량 화포) 1개 소대를 목포지구 비금도로 이동시켰다. 미군의 비행기 습격을 감시할 뿐 아니라 남해·서해 일대에서 활동하는 미군 잠수함과 비행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배치였다.
일본군이 가장 많이 사용한 산포는 94식(75㎜)으로 비금도에도 같은 종류의 산포가 배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일본군 포병중대는 4문 편제였기 때문에 비금도에 배치된 산포병 1개 소대는 1문을 갖췄을 가능성이 크다.
전파경계기 부대는 내월리 마을회관 인근의 논에 막사를 짓고 주둔했다가 해방 이후에는 초등학교 개조해 사용했다. 주민들은 당시 일본군이 설치한 우물을 ‘학교샘’이라고 불렀고, 지금도 남아있는 우물터로 주둔지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 비금도 동굴진지 내부. |
보병 2개 소대가 배치된 자은도는 비금도보다 더 규모가 큰 진지가 구축된 흔적이 남아있다. 자은도에서 확인된 동굴은 모두 20여개로 ‘U’자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동굴 중간 지점에는 남북으로 관통하는 굴이 있고, 동굴을 보호하고 해안을 지키기 위한 토치카(콘크리트 등으로 만든 엄폐 진지)와 포진지도 구축됐다.
자은도 동굴들은 모두 산의 7부 능선을 타고 뚫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서해안을 따라 목포항으로 진입하는 미군의 움직임을 차단하는데 필요한 시설물과 그에 따른 배치로 보여진다.
이들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가혹한 노동 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대규모 공사인 만큼 진지 구축 공사에는 섬 주민뿐 아니라 외지인까지 동원됐으며, 병사노무동원 외에도 근로보국대 형식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군인이 직접 들어가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물을 사용하는 작업을 하고 나면, 근로보국대 등으로 강제동원된 이들이 돌이나 자갈을 운반하는 단순 육체노동을 했다.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배급조차 내어 주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추위도 막지 못하는 좁은 천막에 20여명이 들어가 이불도 없이 짚이 깔린 바닥에서 누워 중노동의 고통과 허기짐을 달래야 했다.
자은도 주민으로 진지 구축 작업에 동원된 서길순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서 씨는 “하루에 세 끼도 안 주고, 집에서 도시락 싸서 다니라고 한다”, “밤낮 할 거 없이 일만 시켰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감시해 도망도 못 갔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양재희 기자 heestory@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