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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은 권력의 문제다 - 김재인 철학자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
2024년 04월 02일(화) 00:00
“세상에서 가장 착한 검둥이도 글을 알면 버릇이 없어진다. 지금 저 검둥이에게 글을 가르치면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다. 당장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런 노예는 주인에게 쓸모가 없다. 노예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만족을 못하니 불행해진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1818~1895)의 증언이다. 자고로 글은 권력이었고, 지배자는 노예에게 글을 금지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 즉 ‘문해력’은 일차적으로 권력의 문제였다.

왜 문해력을 길러야 하느냐고?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다. 자신이 노예로 사는지조차 모르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의탁하지 않기 위해서다. 문해력은 사치의 영역이 아니다. 문해력은 기본권의 문제이다. 본디 권리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흔히 ‘타고난 권리’ 운운하지만, 실제로 권리란 구성되는 것이고 쟁취하는 것이다. 정당성으로부터 권리가 도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권리는 쟁취해야 존재한다. 권리를 쟁취하는 수단이 문해력이다.

문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모두가 문해력을 기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문해력은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만 얻어지니까. 운동이 몸에 좋다는 건 다 알지만 실제로 운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처럼, 문해력도 그러하다. 다만, 문해력이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점도 지적해야겠지만. 가령 아이들이 문해력을 기르는 훈련 과정을 싫어하고 거부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성세대로서 그런 아이들을 오냐 오냐 받아주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나아가 아이들의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박탈해서도 안 된다. 교육이란 교사의 최선의 노력과 병행되어야 하지 않는가.

앞으로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은 문해력 여부로 가름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은 증강 기술이고, 개개인의 역량을 증강하는 기술인데, 역량의 핵심은 문해력이다.

과거 읽고 쓰기는 인문학의 몫이었다. 자연어 능력이 곧 문해력이던 시절, 인문학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이제 내가 말하는 ‘확장된 언어’ 상황에서, 즉 자연어에 보태 수학, 자연과학, 기술, 예술, 디지털도 언어가 된 현 시절에, 필요한 건 ‘확장된 문해력’이다. 이 점에서 전통 인문학은 한참 뒤처져 있다(obsolete). 나는 ‘AI 빅뱅: 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김재인 저, 동아시아, 2023)에서 확장된 인문학을 내세우고 있다.

문해력을 강조하는 것이 문해력이 모자란 사람을 겁박하는 일로 비춰지면 안 된다. 오히려 문해력을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아이들을 어떻게 잘 설득하고 이끌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문해력은 학교 성적도 시험 점수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읽고 쓰기 위한 생각의 기초 체력이다. 따라서 문해력의 강조는 엘리트주의와 상관없으며 기성세대가 모든 미래 세대에게 제공해야 하는 교육 서비스의 중핵이다. 그것은 기성세대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지금 기성세대는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학교가, 입시가, 대학이 문해력을 길러주는 데 집중하고 있는가? 아니면 문해력 향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도록 만드는가? 공부하면 할수록 무능력해지는 교육과정을 시행하고 있는 건 아닌가?

능력에 따라 분배하는 이른바 ‘능력주의’는 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그렇지만 능력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능력’ 자체를 비판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능력,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역량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다. 역량에 따라 줄세우기를 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 아이들이 재미 없어 한다고? 피교육자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교사의 탓이라는 명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