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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인천상륙작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대대적 승전 기념행사 뒤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
대통령 첫 참석 막대한 예산 들여 재연 행사
“자유민주 진영 승전 역사…대첩으로 격상해야”
폭격·학살…밝혀진 민간인 희생자 100명 넘어
월미도 실향민들 “고향땅 이제라도 찾아주길”
2023년 10월 09일(월) 19:15
15일 인천 팔미도 인근 해상에서 열린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행사’에서 해병대 KAAV (한국형 상륙돌격장갑차)가 적을 교란하기 위한 연막을 터뜨리며 상륙작전을 펼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인천시와 해군이 지난달 15일 인천 앞바다에서 개최한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는 해마다 열린 역대 행사 가운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우선 윤석열 대통령이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식에 참석하고, 상륙작전 재연 행사를 주관했다. 1960년부터 열린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전승 기념식에서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 공산화를 막은 역사적 작전이자 세계 전사(戰史)에 빛나는 위대한 승리였다”며 “굳건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기반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압도적 대응 역량을 확보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기념사는 인천상륙작전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승전 역사로 격상시킨 것이다.

인천시는 2억원 내외였던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예산을 올해 국비·시비 포함 27억3천만원으로 확대했다. 올해 인천시는 대대적인 인천상륙작전 재연 행사를 포함해 지역 곳곳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문화 행사와 국제학술대회 등을 열었다. 인천시는 내년부터 행사를 더욱 확대해 2025년 제75주년 행사부터는 한국전쟁 참전 8개국(한국·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호주·뉴질랜드·네덜란드) 정상급 인사가 참석하는 국제행사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인천시는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의 주제를 ‘세계평화도시’로 설정했다. 인천상륙작전이 국내외에서 더욱더 조명받을 여건이 조성됐다.

인천상륙작전을 조명하는 빛의 세기가 강할수록 그 뒤로 드리우는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올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가 ‘전승 기념 강화’, ‘대통령 중심’으로 흐르면서 ‘인천 지역·민간인 피해’처럼 전쟁의 비극을 상기하는 주제들은 과거 행사보다 더 소외됐다.

정전 70년을 맞아 몸집을 키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가 끝난 후 ‘인천상륙작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가 던져졌다. 인천상륙작전을 둘러싼 상반된 기억은 여전히 화해하기 어렵다.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를 앞둔 지난 9월12일 인천 중구 월미공원에서 열린 월미도 희생자 추모행사에서 희생자 유족 등이 헌화한 후 묵념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대첩으로 격상해야” 승전의 기억=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은 1953년 7월27일 정전 협정까지 ‘한국전쟁 3년’을 기준으로 초반에 일어난 전투지만, 전선이 38도선 주변으로 고착화한 1951년 3월을 기준으로 따지면 딱 중간 지점이다. 인천상륙작전 전후로 전쟁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한국군과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고 북진하는 계기였다. 이후 중공군 참전으로 한국전쟁이 본격적으로 국제전 성격을 띠게 됐다. 인천상륙작전 전후, 북진, 1·4후퇴 사이 민간인 학살이 집중됐다. 한국전쟁의 분수령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세로 전환했으며, 공산화를 막았다는 군사적 의미가 주류의 시선이다. 작전을 수립해 진두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한국전쟁의 영웅이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 동상이 군사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기억하는 주류의 시선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인천시가 지난달 8일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주간에 개최한 ‘국제평화콘퍼런스-인천상륙작전과 글로벌 인천의 미래’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을 ‘대첩’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장순휘 한국문화안보연구원 부원장은 “적에게 결정적 위협이 된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전선의 적군을 급속히 와해시켰고, 서울을 탈환해 적의 병참선이 차단됐다”며 “성공적으로 완수된 이 작전에 의해 인천항 시설, 서울에 이르는 김포공항, 병참시설 전반을 북진 작전을 위해 이용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특히 수세의 전세를 공세로 일거에 역전시킨 위대한 작전이었다”며 “고구려 살수대첩, 고려 귀주대첩, 조선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 독립군 청산리대첩과 함께 ‘인천상륙대첩’으로 명칭을 바꾸는 것을 검토할 단계”라고 주장했다.

육군대학 한국전쟁사과 이광수 중령은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무력 투쟁에서 공산군에게 괴멸적 타격을 준 유일한 승리”라며 “최소한의 희생으로 완벽하게 전세를 역전한 전투”라고 했다.

한인덕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장이 지난 8월21일 인천 중구 월미도 한 전시회장에서 열린 ‘기록으로 보는 월미도 귀향 이야기’ 전시회에서 인천상륙작전 당시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희생과 귀향 대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여전히 아물지 않은 지역의 상처=인천 지역적 시선에서 승리의 대가는 큰 희생이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닷새 전부터 상륙지 월미도 등지에 퍼부은 폭격으로 최소 100명 이상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100명의 희생은 정부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공식적으로 규명한 피해 규모이고, 실제론 더 많을 가능성이 있다. 월미도뿐 아니라 인천 시내 곳곳이 폭격으로 파괴됐고, 인천 섬과 시내 등지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도 일어났다.

지난달 15일 인천 지역 시민단체가 주최한 ‘인천과 한국사회, 인천상륙작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학술 심포지엄에서 토론자로 나선 최태육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은 지역 피해를 정리했다. 최 소장은 “1950년 8월18일 이후 덕적도와 영흥도에 이르는 섬 거주민 학살, 월미도 네이팜탄 투하, 월미도·송현동·송림동 등 인천 일대 무차별 포격 등 적어도 인천상륙작전은 인천 인근 섬과 시내 주민들에게는 공포와 상처였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월미도 주민들은 터전을 잃고 현재까지도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투쟁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미군 부대가 월미도에 주둔하면서 원래 살던 섬 주민들은 쫓겨났다. 1971년 미군 부대가 월미도에서 철수했으나, 다시 한국 해군이 주둔했다. 2011년 해군이 떠난 후 인천시가 월미도 군부대 부지를 매입해 월미공원을 조성했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1950년대부터 지속으로 귀향 대책을 정부와 인천시에 요구했으나, 여전히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월미도 실향민 대다수는 80대 이상 고령이다.

이른바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 권고 내용은 ‘위령 사업 지원’ ‘원주민의 귀향 지원’ ‘미국과의 협상(한미 공동 조사와 공동 책임)’이다. 월미도 희생자 위령비는 인천시가 2021년 월미공원에 건립했다. 인천시는 올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를 진행하며 처음으로 ‘위령비 헌화 행사’를 별도로 마련했다.

한인덕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장은 “지금도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며 “고향 땅을 찾아 달라는 당연한 요구를 이제는 받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호철 인천대 명예교수는 시민단체 주최 학술 심포지엄에서 “인천상륙작전의 군사학적·전쟁사적 의의보다는 이를 통해 인천과 대한민국, 세계가 공유하게 된 보편적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며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는 자유와 평화라는 세계적 보편 가치를 미래로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인일보=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