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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데자뷔 - 고성혁 시인
2023년 07월 19일(수) 00:00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기억을 갖는다. 영혼에 박혀 별이 된 그것은 가슴을 떠돌다 우리 삶의 여정 어디쯤에서 불쑥 우리를 꿈처럼 위무한다. 아, 온전한 사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지난겨울의 끝자락 나는 남은 생의 해거름이 될 가슴 먹먹한 서사를 만났다.

몇 마리 키우는 닭을 살피다 산골짜기 허방을 딛고 말았다. 도랑은 이 미터나 되었고 하늘을 보며 떨어진 탓에 돌멩이 위에서 허리가 꺾였다. 이웃 할머니도, 아내도 비명을 들을 수 없는 깊은 곳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아내에게 발견되어 부서진 몸뚱이를 119에 실었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신음. 병원에 도착해서는 짐짝처럼 실려 엑스레이와 MRI를 찍었다. 순식간에 삶이 엉켰다.

절망은 오래전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도 낙상했었다. 섬에서 작은 배를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어느 날 몇 마리의 생선을 낚았다. 술을 좋아한 양반이었던지라 잡아 온 우럭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고 종래는 취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마루에서 굴러 섬돌 위로 떨어졌다. 그때 나는 이십 대였고 아버지와는 태생의 업과(業果) 때문인지 오랫동안 소원해 있었다. 대학병원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머리 양편 뚫린 구멍에 쇠사슬이 박혔고 그 아래 쇠뭉치를 매단 채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의 처참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병구완하던 누이가 아버지의 허리를 모로 세우자 시커멓게 썩은 등이 드러났다. 아, 아버지 등에서 살아 꾸물거리는 것들. 경추를 다친 아버지는 결국 육 개월 만에 운명하셨다. 그렇게 아버지를 상기하며 내게 닥친 절망을 꼼꼼히 반추하고 있을 때였다. “요추는 바스러졌지만 천만다행 신경은 손상되지 않았네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겠구나. 그 짧은 순간 나는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 선 아버지의 고독을 절감했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그때부터였다. 누워 있어야만 했다. 먹어야 사니 누운 채 어구구, 소리를 내며 먹었고 비스듬히 등을 세우고 오줌을 누었다. 티브이 켜진 병동의 소란과 간호사들의 내밀한 대화. 한밤을 깨우는 신음소리들. 배불뚝이 아저씨의 코골이와 간이침대 위 혼곤히 잠든 아내의 꿈말을 타박하는 옆 영감의 구시렁거리는 소리. 입맛이 없다는 나 때문에 옷 속에 햄버거를 감춰 오던 아내의 발그레한 얼굴과, 저녁이면 물티슈로 내 발가락 새를 닦던 그녀의 흔들리던 흰 머리카락. 그리고 그 풍경을 관통하는 끊임없는 고통.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집에 다녀온 아내가 사라진 안경을 끝내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널브러졌던 계곡의 차가운 느낌이 온몸을 덮치는 듯했다. 그 경황 중에 안부랍시고 전화한 아들놈이 병실의 시끄러운 티브이 소리를 듣고는 제 엄마를 타박했다. 딱 걸렸다면서. 다쳤다고 말할 순 없었다. 전화를 빼앗은 나는 늙었다고 술 한잔도 못 마시느냐고 되레 큰소리를 쳤다. 병실은… 그렇게 새로운 감각을 일으키는 통각의 장이었다.

닷새가 지났다. 벌레가 기는 듯한 가려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모양이 한밤까지 이어지자 부스스 어딘가를 다녀온 아내가 속삭였다. 샤워하러 갑시다. 샤워? 휠체어를 탄 채 링거대를 잡고 아내에게 끌려간 곳은 세면장 한편의 칸막이 샤워장이었다. 벽을 짚고 섰다. 척추 압박 슈트를 벗긴 아내가 몸을 발가벗겼다. 물을 뿌린 아내가 비누칠을 했다. 그 순간 느닷없이 묵은 기억이 솟구쳤다. 전율이 일었다. 아, 육십 년 전의 그날 저녁…. 다니시던 공장에서 붉은색 고무 대야를 가져온 날, 어머니는 코 묻어 반질거리는 내 다우다 점퍼를 벗기고 겨울바람에 갈라 터진 손등을 바라봤다. 시커먼 때가 덕지덕지 내려앉아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어머니는 데운 물을 대야에 붓고 그 안에 나를 앉히셨다. 누룽지처럼 뚝뚝 흘러내리던 때와 들썩이는 내 등. 그리고 철썩철썩 두들기시던 어머니의 손길. 그 겨울 밤 어머니의 수심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무렵 서산동 산꼭대기에서 바라봤던 배들을 기억한다. 나갔던 배는 반드시 항구로 돌아왔다. 삶을 마감하고 이제 흔적도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 돌아온 집의 참나무에 기대 그 시절 어머니의 고독과 지난봄 내가 만든 아내의 좌골신경통을 생각한다. 내가 돌아가야만 할 항구와 내 남겨진 삶의 궤적도 생각한다. 건너 숲이 석양에 일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