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보은(報恩)의 길- 김원명 광주원음방송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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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 1일이 되면 원불교 교단에서 일제히 육일대재(六一大齋)를 거행한다. 육일대재는 소태산(少太山) 대종사(大宗師)를 비롯하여 역대 제불제성 및 부모선조 일체생령들을 추모하는 향례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효를 모든 선행의 기본으로 보셨다. 효는 예로부터 인륜의 으뜸가는 규범이 되어 왔으며 모든 성자들이 그 실행을 권면했다. 불교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는 태중에서부터 출생과 성장까지의 모든 수고로움을 밝혀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가르쳐 주었고, 성경에도 살아 있는 부모를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대종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네 가지 큰 은혜가 바탕이 되고 있음을 밝혀 주시고 이 네 가지 은혜가 아니고는 잠시도 생명을 보존할 수 없음을 깊이 자각하여 보은의 도리를 다하도록 하였다. 사은 중 부모 피은의 강령을 보면 “우리가 부모에게 입은 은혜를 가장 쉽게 알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부모가 아니어도 이 몸을 세상에 나타내게 되었으며 설사 나타났더라도 자력 없는 몸으로서 저절로 장양될 수 있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볼 것이니…” 하여 근원적인 관계를 깨우쳐 주시고 피은의 조목을 통하여 은혜 된 구체적인 내력을 밝혀 주셨다.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는 길로써 다시 보은의 강령과 보은의 조목을 들어 자녀의 도리를 일러 주셨고, 보은의 결과와 배은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밝혀 배은을 경계하고 보은을 권장하셨다. 사람이 바른 행동을 하려면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한다. 생각이 바르지 않고 그 행동이 바르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부모에게 효를 하는 데에도 부모의 은혜에 대한 깊은 깨침이 있어야 한다. 물론 아는 것으로서 바른 실행이 되는 것은 아니나 참으로 알면 실행하게 되고 실행하게 되면 앎이 깊어진다.
‘부모에 대한 피은(被恩)·보은·배은(背恩)을 알지 못하는 것과 설사 안다 할지라도 보은의 실행이 없는 것’이 다 부모 배은이 된다 하였다. 부모에 대한 은혜는 사은 중 어느 은혜보다도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은혜다. 따지고, 생각해서 아는 은혜가 아니라 그대로 느껴지는 은혜다.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란 그대로 하늘이 맺어준 천륜(天倫)이며 본능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따질 것도, 생각할 것도 없는 무한 자비이다. 그러나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못하다. 어머니의 보호 밑에 있을 유년기에는 부모가 자기 세계의 전부다.
어머님의 품은 가장 편한 안식처요, 의지처다. 그러나 부모의 품을 벗어나 독립하면서부터 마음도 부모를 떠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품안의 자식이 자식이지…” 하는 말을 하게 된다.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끝이 없는 것이나 자녀는 그 사랑의 크기를 헤아리지 못한다. 당연한 양 받아들이기도 하고 지나치다고 귀찮아하기도 하고 적다고 불만을 갖기도 한다.
부모 사랑을 알려면 자식 낳아 길러 보아야 한다고 한다.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에 비추어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헤아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베푼 사랑은 크게 알고 받은 사랑은 소홀하게 생각하며 곧 잘 잊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종사께서는 “부모가 아니어도”라는 가정을 통해서 부모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하셨다. “만사 만리의 근본되는 몸을 얻게 됨”과 “사랑을 다하고 수고를 잊으며 양육하고 보호하여 주심”과 “사람의 의무와 책임을 가르쳐 인류 사회로 지도하신” 은혜를 가슴 깊이 느끼고 알아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부모님 은혜를 비하여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한다. 그러나 이 크고도 절실한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부모를 저버리는 사회는 사랑이 없는 황량한 사회다. 부모 자녀 사이가 지극한 사랑과 섬김으로 충만 되고 형제간의 우애와 이웃 간의 인정이 넘치는 사회, 이러한 사회를 가꾸어 가는 일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절실한 과제가 아닐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효를 모든 선행의 기본으로 보셨다. 효는 예로부터 인륜의 으뜸가는 규범이 되어 왔으며 모든 성자들이 그 실행을 권면했다. 불교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는 태중에서부터 출생과 성장까지의 모든 수고로움을 밝혀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가르쳐 주었고, 성경에도 살아 있는 부모를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부모에 대한 피은(被恩)·보은·배은(背恩)을 알지 못하는 것과 설사 안다 할지라도 보은의 실행이 없는 것’이 다 부모 배은이 된다 하였다. 부모에 대한 은혜는 사은 중 어느 은혜보다도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은혜다. 따지고, 생각해서 아는 은혜가 아니라 그대로 느껴지는 은혜다.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란 그대로 하늘이 맺어준 천륜(天倫)이며 본능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따질 것도, 생각할 것도 없는 무한 자비이다. 그러나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못하다. 어머니의 보호 밑에 있을 유년기에는 부모가 자기 세계의 전부다.
어머님의 품은 가장 편한 안식처요, 의지처다. 그러나 부모의 품을 벗어나 독립하면서부터 마음도 부모를 떠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품안의 자식이 자식이지…” 하는 말을 하게 된다.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끝이 없는 것이나 자녀는 그 사랑의 크기를 헤아리지 못한다. 당연한 양 받아들이기도 하고 지나치다고 귀찮아하기도 하고 적다고 불만을 갖기도 한다.
부모 사랑을 알려면 자식 낳아 길러 보아야 한다고 한다.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에 비추어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헤아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베푼 사랑은 크게 알고 받은 사랑은 소홀하게 생각하며 곧 잘 잊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종사께서는 “부모가 아니어도”라는 가정을 통해서 부모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하셨다. “만사 만리의 근본되는 몸을 얻게 됨”과 “사랑을 다하고 수고를 잊으며 양육하고 보호하여 주심”과 “사람의 의무와 책임을 가르쳐 인류 사회로 지도하신” 은혜를 가슴 깊이 느끼고 알아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부모님 은혜를 비하여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한다. 그러나 이 크고도 절실한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부모를 저버리는 사회는 사랑이 없는 황량한 사회다. 부모 자녀 사이가 지극한 사랑과 섬김으로 충만 되고 형제간의 우애와 이웃 간의 인정이 넘치는 사회, 이러한 사회를 가꾸어 가는 일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절실한 과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