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비관에서 얻은 용기 -구병모 미니 픽션 ‘로렘 입숨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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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의 ‘소설처럼’] 비관에서 얻은 용기 -구병모 미니 픽션 ‘로렘 입숨의 책’
2023년 04월 19일(수) 23:00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한때는 우리도 인간에게 희망이란 걸 걸었던 적이 있었다. 인간의 선한 의지로 세상은 더 좋아질 수 있으며, 인간이 만들어내는 과학과 문명으로 세계 곳곳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같은 것이다. 지금 그런 믿음은 순진하다 못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다. 혹자는 잔인함보다는 다정함으로 인류는 살아남았다고 하고(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의 자리는 점점 줄고 있다는 보고 또한 있지만(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현실에서 인간은 서로를 배척하는 이기주의자가 분명하며, 지구에서 인류는 환경을 파괴하는 악한임을 부인할 도리가 없다.

십수 년 전 SF에서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는 대체로 지구 바깥에서 찾아오는 이방인, 즉 외계인이었으며 인류는 이에 힘을 합쳐 대항하는 선한 주인공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작금의 SF에서 인류의 적은 인류로 그려지는 게 그 작품을 합당하게 한다. 김초엽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에서 지구를 황폐하게 하고 폐허가 된 지구에서 약한 자를 착취했던 이는 물론 인간이다. 조예은 장편소설 ‘스노볼 드라이브’에서 디스토피아를 만든 이, 그 속의 더한 디스토피아로 타인을 몰아넣는 이 모두 당연하게도 인간이다. 소설적 상상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인간에 대한 비관적 인식을 마주하고 있지만, 모두 상상이라기에는 현실은 냉혹하다. 태평양 한가운데 플라스틱 섬처럼, 인식하고 싶지 않은 암흑의 핵심으로, 우리 공동체의 악행은 실재하는 것이다.

구병모 소설은 이러한 비관에 일찍 눈뜬 듯하다. 첫 소설집인 ‘고의는 아니지만’에서부터 작가는 인간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치밀하고 과감하게 엮어 맸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가의 다른 작품과 사뭇 다른 뉘앙스와 주제 의식을 갖는다. 구병모의 작품 세계는 하나의 나무, 같은 뿌리에서 자란 다른 줄기인데도 그 줄기와 잎사귀가 워낙 다채로워 울창한 숲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최근 미니 픽션 모음집 ‘로렘 입숨의 책’은 숲의 색감과 질감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인간에 대한 비관적 인식과 전망을 배후에 두고, 작가의 상상력은 멀리 뻗고 깊게 자리한다. 손써 볼 틈 없이 자란 야생의 잡목처럼 가까이에서 보면 위협적이고 멀리서 보면 웅장하다.

‘화장의 도시’는 죽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정확한 결과물로 나오는 세계의 서늘함을 보여준다. 결과물은 꽃이다. 생전의 고결함을 가진 이는 무덤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범죄자거나 파렴치한으로 살았던 사람은 기괴한 꽃이 피어난다. 우리 중 과연 누가 죽음 후 아름다운 꽃이 될 것인가?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게 자명한데, 그건 소설의 결말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닫힌 문’은 인간에 대한 비관이 인간이 영위하는 예술에 대한 비관까지 나아간다. 최근 각종 매체에서 유행한 경쟁형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아이디어가 시작된 듯한 이 소설의 오디션은 실제 오디션보다 훨씬 맵다. 힙합 경연 프로그램에서 탈락자가 가짜 불구덩이에 빠진다면, 소설에서 탈락자는 맹수가 도사린 구덩이에 빠진다. 실력이 뛰어나면 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닫힌 문’의 예술은 예술적 수월성만으로는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세상에 태어난 말들’은 인간이 이루어낸 언어 체계에서 세계의 허점을 발견한다. 단호하게 배격하고 삭제되어야 할 말인 듯하나, 인간의 복잡함은 나쁜 단어의 퇴출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천사나 신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누더기 인간’은 투명인간에 대한 현실적 사유가 돋보인다. 투명인간은 소수자 중에서 소수자일 것이고, 우리 사회가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투명인간은 투명이 아닌 누더기 얼굴의 인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구병모 소설의 비관을 따라 읽다 보면, 놀랍게도 비관이 모여 자그마한 의지가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시간의 벽감’과 같은 소설을 읽을 때, 인간에 의해 모든 것이 망쳐졌지만, 그 망가진 세계에서 살아남아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자 또한 결국 인간이다. 앞서 말한 소설에서도 잔혹함을 바라보고 거기에 냉소든 저항이든 행동을 취하는 것도 인간이다. 결국 구병모의 비관은 인간은 이미 망해 버렸다는 비관이 아니라, 망해 버린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비관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비관은 용기라 불러도 틀리지는 않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비관은 용기를 준다. 구병모의 비관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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