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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주는 여운- 이중섭 소설가
2022년 11월 24일(목) 01:00
어젯밤에 읽다 만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마저 보고 있었다. 거실에 있던 아내가 여행 가방이 안 열린다고 울먹였다. 아내는 딸과 이 박 삼 일 제주에 다녀왔다. 비밀번호를 맞췄는데도 열리지 않는다며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나에게 빨리 좀 고쳐 달라 재촉했다.

다 읽은 후 여행 가방에 손을 대고 싶었지만 출근 시간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난감했다. 아무래도 잠금 장치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여행 가방을 세워서도 해 보고 눕혀서도 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벌써 여덟 시가 됐다. 출근 시간은 다 되었고, 여행 가방 잠금 장치도 해결해야 하고, 읽다 만 소설 끝부분도 마저 읽어야 하는데 짜증이 확 솟구쳤다.

아무래도 여행 가방을 열어 놓고 출근해야 할 것 같았다. 얼른 네이버 검색란에 ‘여행 가방 비밀번호 고장’을 쳤다.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 번째는 비밀번호를 리셋하는 방법이었다. 여행 가방을 자세히 보니 리셋 홈이 없었다. 아내에게 여행 가방 어디서 샀냐고 물으니 지인이 부탁해서 샀다고 했다. 제조 회사도 적혀 있지 않았다. 색상도 조금 촌스러웠다.

아, 지금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어야만 출근 전에 마치고 지하철 안에서는 눈을 감고 쉴 수가 있었다. 오후부터는 다른 책을 읽을 수 있을 건데 하는 마음이 계속 요동쳤다. 책상 위에 놓인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지리산의 짙은 여름 색 표지를 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소설은 빨치산인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자본의 시대를 사는 딸의 시점으로 쓰였다. 조문객을 맞으면서 아버지가 살았던 삶을 반추하며 서서히 한 사내의 삶을 이해한다는 내용이었다. 딸의 생각과 시선이 조금 발칙했다. 문장은 상큼, 발랄했다.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로 시작했다. 문장의 가독성이 좋았다. 게다가 사투리를 대화가 아닌 지문에다 그대로 쓴 부분이 몇 군데 보였다. 이래도 되나? 의문이 들었지만 읽는 데 걸림이 없으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어젯밤 내내 읽다 자기를 반복했다. 몇 장 남지 않았는데 아침부터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소설 뒷부분이 계속 어른거렸지만 다시 여행 가방에 집중했다. 얼른 네이버의 두 번째 해결 방법을 읽었다. ‘여행 가방 비밀번호가 바뀌는 경우’가 눈에 들어왔다. 여행 중에 비밀번호가 스스로 바뀌는데 그 번호를 찾는 방법이었다. 쉽게 말해 눈을 감고 번호를 천천히 돌리면 바뀐 번호에서 색다른 느낌이 온다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도둑들이 자주 사용하는 장면이었다. 별수 없었다. 마지막 번호를 눈을 감고 천천히 돌렸다. 투 투 투…….

그때 확, 방문이 열리며 식사하라고 아내가 소리쳤다. 애써 손끝과 머리에 집중한 감각이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아내는 꼭 중요한 순간에 훼방을 놓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식사보다 여행 가방의 잠금 장치를 푸는 것이 더 급했다. 다시 손끝과 머리에 신경을 집중해 번호를 돌렸다. 뭔가 턱 걸렸다. 얼른 눈을 뜨고 보니 원래 3이었던 자리에 숫자 5가 웃고 있었다. 푸시(PUSH) 장치를 오른쪽으로 밀자 잠금 장치가 열렸다. 얼른 아내를 불러 성공을 알렸다. 세 번째 방법은 열쇠를 절단하는 것이었는데 거기까지 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시간은 여덟 시 이십 분. 출근하려면 최소한 삼십 분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식사를 재촉하는 아내 말을 무시하고 세수를 먼저 했다. 오 분 남았다. 얼른 읽다 만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다섯 페이지니까 충분했다. 남은 부분을 빨치산이 산을 타듯 파바박 읽고 맨 뒷장 작가의 말까지 다 마쳤을 때 정확히 여덟 시 삼십 분이었다. 얼른 가방에 다음 읽을 책을 넣고 거실로 나왔다. 아내에게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괜찮다며 읽어 보라 건넸다.

아내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고 책을 받았다. “당신을 만나 좋은 소설 하나는 겁나게 많이 읽네.” 아내와 나는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소설을 읽던 중에 잠깐 눈물이 맺힌 부분이 있었다. 그때 작가 약력을 들춰 보았다. 나와 비슷한 연배였다. 이 작가의 첫 번째 책이 너무 강렬해 익히 알고 있었다. 미처 나이는 몰랐다. 앞으로 소설에만 전념한다면 한국 소설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