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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눈을 가리지 않도록- 김동하 소설가
2022년 11월 17일(목) 00:15
가을이어서, 그저 가을이란 이유로 울적해지는 거라면 좋겠다.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있는 세월을 살아오며 숱한 이별을 겪었고 모든 이별의 순간은 슬펐다. 그런데도 이 계절은 남은 이별이 지나간 이별보다 무거운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형형색색의 단풍들조차 한 철의 기억이 스러지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마냥 예쁘다고만 말하지 못하겠다.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다. 그날은 평범한 여느 하루였을 뿐인데 밥을 먹다 울컥 울고 말았다. 콩나물국이 짜서도, 생선 가시에 찔려서도 아니었다. TV프로그램 속 아이 엄마의 혼잣말 때문이었다.

가족 여행을 떠난 부부에게는 미취학 아들과 딸이 있다. 카페에 들른 부부는 아이들에게 직접 메뉴를 주문하도록 지켜만 보기로 했다. 부부는 아이들이 카페 안으로 사라지자 창문 너머로 초조하게 아이들의 행동을 지켜본다. 순조롭지는 않았으나 아이들은 심부름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직접 주문해 받아온 아이스크림을 정신없이 먹는 두 아이를 보며 엄마는 말했다. “이대로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나둘 알아가는 게 늘어날수록 슬퍼져.” 아직 자녀도 없는 나인데도 그 말이 눈물샘을 꾹 눌렀다. 아이들이 자라야 하는 걸 알지만 자라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 서둘러 어른이 되고픈 아이들의 마음과는 반대되는 마음.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퍽 고달프고 힘들었으니까.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 몰랐으면 하는 세상도 있으니까.

조금 다른 맥락일 수도 있겠으나 겁 많은 부모들이 떠오른다. ‘저 애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와 같은 맥락에 놓인 부모들 말이다. 아이의 작은 행동도 부모에게는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상상의 끝은 대부분 불길하다. 그게 부모가 살아오며 겪었던, 최소한 기억에 남아 있는 세상에 대한 주된 인상이니까.

그러나 그런 부모의 불안과 상관없이 자녀들은 때가 되면 부모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려고 한다. 부모는 그게 당연한 섭리란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다. 양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녀를 독립시키는 거니까.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마음의 동의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비극은 전 국민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고 비통해 하다 분노하게 했다. 살아가는 동안 최대한 접하고 싶지 않은 ‘참사’라는 명사는 이후로도 반복됐다. 얼마 전 일어난 이태원 참사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는 장소를 일상적인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소설을 쓰고 있고 그중에서도 스릴러란 장르를 집필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범죄를 자주 다루게 된다. 범죄와 더불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을 자주 상상해야만 하는 굴레를 쓰고 있다. 그런데 내 이런 상상을 현실은 번번이 비웃는다. 강연 중 자녀들의 앞날을 걱정하던 부모들에게 ‘자녀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세요’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앞으로도 같은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은 죄가 될 수 없다. ‘왜 그런데 놀러 가서는’이라고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발언이 들릴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다시 앞서 어린 남매에게 아이스크림 주문을 맡긴 부부에게로 돌아가 본다. 남매는 부모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생애 첫 주문을 마친다. 그러나 사실 부모는 유리창 너머로 어린 남매의 행동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만일에 대비해 안전망이 되어 주고 있던 것이다. 그날 이태원에 이런 안전망이란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해 모든 어른은 어른인 척하는 아이들이다. 놀이와 장과 방식에 있어 변화가 있을 뿐이다. ‘놀이’는 인간을 포함해 지능이 높은 동물을 규정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문명은 호모 루덴스, 다시 말해 놀이하는 인간이 쌓아온 무엇이기도 하다. 아직은 수습하고 눈물을 흘릴 때라고, 책임을 추궁할 단계가 아니란 말도 들린다. 그러나 모두가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변명과 꼬리 자르기식 책임 추궁이 아닌 진정한 자성과 책임이다. 우리에겐 비슷한 참사를 예방하기 위한 엄중한 책임이 필요하지 눈 가리기를 위한 책임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러니 나를 포함해 속죄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결코 눈 가림에 현혹당하지 말자. 두 눈을 부릅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