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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미와 공작초-정근식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2022년 08월 02일(화) 00:45
지난 6월 25일 경북 경산의 압량 행복발전소에서는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경북시민재단이 마련한 ‘역사적 상처의 치유와 화해를 위한 평화문화 캠페인’ 행사였다. 이 자리에 73년 전 팔공산 유격대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와촌면 박사리마을 유족들과 72년 전 평산동 코발트광산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유족들이 초청되었다. 그동안의 고통을 위로한다는 의미에서 노란 장미 코사지를 서로의 가슴에 달아주면서 시작된 이 행사에서 유족들은 현재 진행 중인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작업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앞으로의 소망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두 유족회장들은 특별히 준비한 꽃다발을 교환했는데, 거기에는 새로운 시작과 화해를 상징하는 흰 장미와 보랏빛 공작초가 들어 있었다.

팔공산 갓바위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 끝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박사리에 말할 수 없는 비극이 닥친 것은 1949년 11월 말이었다. 한 달 전에 이웃 마을에 사는 한 나무꾼의 신고로 팔공산 빨치산들이 토벌된 일이 있었는데, 그 보복으로 다른 무장대가 들이닥쳐 주민 38명을 살해하고 주택 100여 채에 불을 지른 후 도주했다. 아직까지 그들의 정체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민들이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유족들은 1961년 9월 작은 ‘반공혼비’를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 세워 희생자들을 기억하려고 했고, 1985년에는 반공위령비를 세워 아픔을 달랬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마을을 벗어나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특별히 찾아와 위로하는 사람도 없었다.

평산동의 코발트 광산은 1950년 여름 인근 지역의 보도연맹원들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수천 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현장이다. 이곳은 1980년대 후반에 한 안경공장이 설립되어 약 10년간 조업하다가 폐업한 후 공포 체험장으로 널리 알려졌고, 전쟁 당시의 참극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망각되었다. 2007년부터 3년간 진실화해위원회가 이곳의 수직 갱도와 수평 갱도에서 유해를 발굴한 이후 이곳에서 벌어진 비극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유족들은 이곳의 유해를 완전히 발굴한 후 평화 교육의 현장으로 만들 것을 희망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제약으로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같은 군에 속해 있지만, 지난 70년간 박사리에서 코발트광산으로 가는 길, 또는 코발트광산에서 박사리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아예 왕래가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시민단체의 뜻 있는 분들은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그 길의 중간 지점을 만남의 장소로 선택했다.

이날 모임에서 박사리 유족들은 자신들의 희생에 관한 무관심 때문에, 코발트광산 유족들은 지역의 정치적 환경 때문에 힘들었다고 호소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코발트광산 유족회장은 “그동안 발굴된 유해들이 증거하고 있는데, 왜 또다시 유족들이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을 입증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진실 규명 신청인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사과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박사리 유족회장은 진실 규명 이후에 “적대 세력에 의한 희생자들도 적절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작은 기념관이라도 하나 세워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날 발표를 맡은 영남대 김문주 교수는 이 지역 출신 대학생들이 서울에서 겪는 애환을 토로하면서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 온 정치의 섬, 역사의 섬 현상을 극복하려면 지역 사회의 경험을 승화시키는 문화예술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경산시를 화해와 평화의 도시로 만드는 것에 대하여 동의했고, 시장 당선자도 이를 경청했다. 가장 울림이 컸던 것은 “우리는 그동안 말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말조차 꺼낼 수 없었던 코발트광산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박사리 유족회장의 언급이었다.

그렇다. 화해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작은 위로로부터 시작되며, 균형 잡힌 시각에서 전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지속가능하게 된다. 화해의 출발이 될 가을의 추모제가 기다려진다.